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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019
Work
Trailer) 접붙인 낱말들, 잘려진 이름들 Grafted Words, Eliminated N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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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붙인 낱말들, 잘려진 이름들
Grafted Words, Eliminated Names

Single channel video, 11min 22sec, 2023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도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그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그보다 작으면 침대의 길이에 맞게 늘여서 죽이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은, 자기 생각을 기준 삼아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고치려는 행위 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난폭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뜻이다. 이번 작업에서 영상의 스크린을 일종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설정하여,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의 모순적 측면을 살핀다. 한국 전체인구의 약 4.5%, 약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여러 목적과 이유로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민족, 출신 국가의 배경으로 인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 난민, 외국인 노동자, 동포 등 다양한 상태로 존재하는 이름들이 한국 사회의 틀에 맞추어, 어떻게 변모하고 탈락하였는지 조명한다. 실제 한국 귀화 면접시험에 출제되는 문제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새롭게 작성한 질문들은 “한국인 되기”의 실재와 허구의 간극을 드러내고자 했다.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질문들은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 위한 통행권일까? 그것은 새로운 낱말을 입고, 자신의 이름을 지워내야 답할 수 있는 것인가? 견고한 사각의 틀을 넘어 우리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를 노래할 수 있는가? 이번 프로젝트는 전작 <우문현답>(2012), <속삭이는 분자들>(2022)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기존 텍스트를 거슬러 읽고, 이어쓰기/다시쓰기를 시도하여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In Greek mythology, Procrustes was a bandit who killed people by stretching them or cutting off their legs to force them to fit the size of his bed. The word, 'Procrustean bed' means the arbitrary behavior of imposing others to change their way of thinking by your standard or a violent situation that does not bend his argument. In this work, I set up the video screen as a kind of "Procrustean bed", and try to consider the contradictory aspect of "living in Korean society”. Although about 4.5 percent of the total Korean population, more than 2 million foreigners, live together for various purposes and reasons, discrimination and hatred due to race, ethnicity, and the background of the country of origin are prevalent in Korean society. It sheds light on the names of various statuses such as refugees, foreign workers, and compatriots, which have changed and been eliminated by the framework of Korean society. By referring to the questions presented in the Korean naturalization interview, I bring up the issue of the gap between reality and fiction of "becoming a Korean citizen". Are these questions on the screen the right of way to enter the 'promised land'? Is it only possible to answer if you wear a new word and erase your name? Can we sing "the right to have rights" beyond rigid boundaries? This project shares a common theme with previous works A Wise Answer to a Silly Question(2012) and Whispering Molecules(2022), and I attempt to read against the grain of the conventional text and re-write it to lead to another question.

4th Asian Film&Video Art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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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ake oil sales man and Promised Land_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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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분자들
Whispering Molecules

Moving Text, Metaverse-based platform, 2022

2022년 도큐멘타 15에서 국립현대미술관과 자티왕이 아트 팩토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장기 연구 프로젝트인 ‘2022 아시아 프로젝트’와 자티왕이 아트 팩토리의 ‘테라코타 엠바시(Teracotta Embassy)'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온라인 포럼 「테라코타 프렌드십 - 우정에 관하여」를 함께 개최한다. 이 프로젝트는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우리의 상상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이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며, 지속 가능한 연대와 공동체를 이끄는 힘을 ‘우정’이라는 단어로 전제한다. 프로젝트는 자칫 단순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우정’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며 과연 ‘우정이란 무엇인가?’라는 공통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안유리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언어적 관점’에서 우정을 해석하여, 무빙 텍스트 <속삭이는 분자들>을 통해 선보인다. 이것은 여러 개의 원자가 화학적인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분자’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받아 제작되었다. 즉, 어떠한 원자들이 결합하냐에 따라 성질이 변하는 분자처럼, 각각의 언어와 그 사용자들의 만남에 의해 이야기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했다. 메타버스 공간 안에 떠다니는 텍스트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고 이어지는 형상을 가리킨다. 10년 전, 암스테르담 유학 시절에 작업한 것의 일부분으로, 당시 이방인으로 유럽에 살면서 느낀 고립감, 소통과 불통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는 과정에서 썼던 텍스트의 일부를 개작해 선보이게 되었다. 이 텍스트는 단순히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 번역 혹은 통역될 수 없는 간극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모일 수 있고 그것이 정해진 화음에 벗어나더라도 기꺼이 발화하며 서로 경청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국가, 민족, 인종처럼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주어지고 입혀진 정체성의 한계를 넘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나누고자 한다.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MMCA), Korea and Jatiwagi Art Factory jointly present an online forum titled Terracotta Friendship as a part of the “2022 Asia Project”, MMCA’s long-term research project, and of Jatiwagi Art Factory’s “Terracotta Embassy” program. They embarked on the new project asking what derives our imagination for making a better life and society and presupposed that what empowers sustainable solidarity and community is the word of “friendship.” The project focuses on “friendship,” which may sound like no big deal, evoking thoughts on the common theme of “What is friendship?”

 

In this project, Yuri An interprets friendship from a linguistic perspective and presents it through the moving text Whispering Molecules. She was inspired by the concept of 'molecules' created through the chemical bonding of several atoms. In other words, it expressed the possibility that the interpretation of the story could be different by the communication of each language and its users, just like molecules whose properties change depending on which atoms bond. The text floating in the metaverse-based platform refers to the figuration in which the voices of the people gathered here whisper and connect. This work was part of her work 10 years ago when she was studying in Amsterdam, and she adapted and presented some of the texts she wrote in the process of thinking for a long time about the isolation, communication, and disconnection felt while living in Europe as a stranger. This text does not simply mean despair in the gap between the mother tongue and the foreign language. Although they deviate from the set chord, it contains questions about the possibility of different voices gathering and willingness to speak and listen to each other. Yuri An would like to suggest and share the question: How can we live together in this world beyond the limits of identity given regardless of individual choices such as country, ethnicity, or race? 

Styx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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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틱스 심포니
Styx Symphony

2-channel video installation, 15min 51sec, 2022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스틱스(Styx)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흐르는 강이자, 그 강의 여신을 가리킨다. 이번 작업은 20세기에 발생했던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4명의 여성 시인들-구리하라 사다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마야 안젤루, 고정희-이 지상에 남기고 간 시(詩)어에,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이 시인들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역사적 사건들-히로시마 원자 폭격, 나치와 소비에트, 흑인 민권 운동,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지금의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고 공명할 수 있는지 주목했다. 4명의 시인과 8명의 여성이 스틱스(Styx)가 되어 역사 속에 이름도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곳, 스틱스(Styx)강으로 불러낸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과 차별 혐오에 저항하며, 연대와 용기를 향한 몸짓이다. 초혼(招魂)이다. 

In Greek mythology, Styx is a goddess and river that borders the Earth and the underworld. My work tells stories of people who lived through war and violence that took place throughout the twentieth century. In particular, I focused on four women poets: Sadako Kurihara, Wislawa Szymborska, Maya Angelou, and Goh Jung Hee. All four of these women poets personally experienced traumatic historical incidents, and then wrote about their experiences as poetry. The specific incidents were the atomic bombing of Hiroshima, the oppression of the Nazis and the Soviet Union, the 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 and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I thought about how these historical events could relate to or resonate with us today. I set up these four poets and the voices of eight participating women as the Styx, as described earlier. So the Styx was expressed with the voices of beings who disappeared like smoke, without names or traces in history. After all, these voices are invocations of the spirits, speaking words of consolation and making gestures of solidarity and courage, while simultaneously resisting the discrimination, violence, and hatred that continue to surround us.

약속의 땅, 추방된 기억
Promised Place, Displaced Memory

Image & Text, Website, 2021

<약속의 땅, 추방된 기억>은 프로젝트<우리는 바다에서 왔다>의 두 번째 시리즈 <지도 위 수많은 축 -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 II>를 계기로 제작되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는 ‘오가사와라 섬’을 둘러싼 상상의 여정을 대화 형식으로 담아냈다면, 이번 작업은 서로 다른 시간 축에서 벌어졌던 실제 상황을 각색하여 텍스트와 이미지로 풀어냈다. 두 개의 장소로 태국-미얀마 국경 지역의 멜라 난민캠프와 홍콩을 설정했고, 2010년 실제 방문 당시 기록했던 사진이 출발점이 되었다. 이 두 장소를 둘러싼 이야기의 공통점은 정치적 상황의 격변기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해지거나 동시에 제한되었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따른 정체성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1988년 미얀마 민주항쟁, 1997년 홍콩 반환이 최근 2019년의 홍콩 민주항쟁, 2021년 미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2010년 두 장소에서 경험했던 상황과 이야기들을 접속 지점으로 설정했다. 각기 다른 두 장소를 ‘선택된 시간 축’으로 연결하여 서로에게 과거이자 미래를 공유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팬데믹과 정치적 대립 상황으로 인해 물리적 이동과 접속이 더 어려워진 지금, 이야기의 힘을 통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해본다. 

The work Promised Place, Displaced Memory is produced for the project, <A Few In Many Places—Welcome to Ogasawara II>. In the first project, <We are from the sea—Welcome to Ogasawara I>, I expressed the imaginary journey surrounding the Ogasawara Islands as a form of conversation. This project's second series work is showed real-world situations on different time axes through using the image and the text. I choose two different places: Mae La refugee camp, where is the border area between Thailand and Myanmar, and Hong Kong. The beginning point of this work is the photographs that I visited and recorded at that places in 2010. Those two places have in common is that the movement of people has become active or limited at the same time, and a matter of identity depend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e and the individual while undergoing the upheaval of the political circumstances.

 

By watching the situation of the 8888 uprising in Myanmar in 1988 and the Handover of Hong Kong in 1997, I thought that it seems to be connected to the 2019 Hong Kong protest and the 2021 Myanmar one. The situations and stories that I experienced in both places in 2010 were composed as the link point in this work. I depicted as if sharing the past and the future with each other of two places by linking those different places through the selected time axis. Even though physical movement and access have become more difficult between people due to the pandemic and political confrontation at this moment, I look forward to the possibility of solidarity through the power of the story.

하늘강 마믅소리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5-channel Sound Installation, 3min 43sec, 2021

사라진 말과 존재에 귀 기울이며 언어, 특히 시(詩)를 매개로 한 탐구와 실험을 꾸준히 이어 온 안유리는 <하늘강 마믅소리>에서 고(故) 고정희 시인 (1948-1991)의 시 「프라하의 봄 ∙7 : 85년의 C형을 묵상함」 , 「프라하의 봄 ∙8」 (1986)을 소환합니다. ‘여성, 민족, 민중 해방’이라는 주제로 치열하게 시를 쓰다 간 고정희는 한국 문학에서 여성주의를 이끈 인물입니다. 그의 과감한 시적 언술과 형식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금기를 무너뜨리며 시대에 대항하는 언어를 일궜습니다.

 

2001년 시인의 10주기 추모제에 참여하면서 ‘시’와 ‘여성 문학’을 접했던 십대의 작가는 당시 추모제의 일환으로 친구들과 함께 기획했던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한 사운드 설치 <하늘강 마믅소리>를 선보입니다. 제목은 고정희 시인의 동명의 시 제목이기도 한 ‘하늘강’과 반향(反響)을 뜻하는 순우리말 ‘마믅소리’를 엮어 붙인 것입니다. 시인이 지상에 남기고 간 시어를 읊조리고 반복적으로 “미친년”을 외치는 여성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는 시간을 거슬러 흩어져 있던 여성들의 언어를 불러 모으고, 현재에 반향하며 오늘에 대항하는 언어가 됩니다.

​글. 박가희

With her practice of experimenting with language-specifically poetry-as her medium while paying attention to disappeared words and existence, Yuri An revises “Prague Spring No.7: Meditation on C Hyung in 1985” and “Prague Spring No.8” by poet Goh Jung Hee (1948-1991) in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Goh Jung Hee, who had fiercely written poems on women, the nation, and the liberation of Minjung, is a leading figure of feminism in Korean literature. Her decisive poetic narrative and forms have dismantled the social and political taboos and inaugurated the language resisting her era.

 

Based on the performance that she organized with there friends as a teenager for Goh Hung Hee’s 10th memorial ceremony in 2001, Yuri An presents a sound installation,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commissioned for this exhibition. The title of Haneulgang (meaning “sky river”), quoted from Goh Jung Hee’s poem with the same title, and Mameun-sory (a pure Korean word meaning “resonance”). With all different voices of women reciting the poems that the poet left behind and repetitively exclaiming Michinyeon (“mad women”), they recollect the scattered language of women tracing back in time and generate a language which resists today, resonating in the present.

Text by Gahee Park

포말(泡沫)의 말(言)
Words of Spume

14 Art postcards, 160 X 90mm, 2021

이번 작업은 프로젝트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는 바다를 뜻하는 '공해(公海)’가 프로젝트의 키워드로, 현재는 일본 영토에 속해있으나 19세기 전까지 '공해(公海)’로 존재했던 ‘오가사와라 섬(小笠原諸島)’이 항해의 시작점이자 상상의 공간으로 주어졌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꿈과 좌절,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두 화자(話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한 사람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이 화답하는 형식을 띠며 혁명이 망명으로, 유배가 유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상했다.

19세기 말,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오가사와라에 유배된 조선인 김옥균의 삶에 상당 부분 영향 받았음을 밝히며, 그의 목소리가 공명하여 또 다른 시공간에서 이어 쓰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The work Words of Spume is produced as part of the project <We are from the Sea>. The keyword of this project is “High seas”, which means the seas beyond the territorial waters of any country. Until belongs to the Japanese territory in the 19th century, the Ogasawara Islands were one of the high seas. This place is the starting point of sailing and to arouse the imagination for the work.

 

I expressed through the voice of two people by recalling the story of history, people, dreams, and frustration between the sea. Even though these figures lived in different times, I described their dialogue as if they respond to each other while imagining the process of revolution turning into exile and exile into wandering. When I wrote this story, was influenced by the life of Kim Ok-kyun who attempted to flee to Japan after the failure of the Gapsin Revolution and was exiled to Ogasawara in the 19th century. I added to the story that followed in another space and time with responsive his voice.

Trailer) 파레시아 :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Parrhesia : One Body Two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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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시아 :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Parrhesia: One Body Two Words

Single channel video, 11min 45sec, 2020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 <담론과 진실>에 따르면, ‘파레시아(Parrhesia)’는 고대 그리스어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며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정치와 역사적 변화의 굴레 속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내기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해왔다. 이 작업은 각각의 인물들이 파레시아를 행한다는 가정하에, 동일한 상황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진술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점은 영화 <라쇼몽>에서 드러난 서사 구조를 빗댄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와 닿아있다. 영상에 등장하는 4명의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좌우 이념 대립으로 새롭게 재편된 4개의 국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A. 소비에트 체제를 경험한 사람. B. 문화 대혁명을 겪은 중국 지식인. C. 남파 간첩. D.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가이다.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국가의 입장에 의해 개인의 삶이 희생되거나 송두리째 변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정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국가와 이념의 변화 속에서 거대 권력에 의해 여전히 흩어지고 지워지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다.

​​* 이 작업은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 : 파레시아>와 영화 <라쇼몽>(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 영감받아 제작되었다.

According to Discourse and Truth by Michel Foucault, “Parrhesia” is the Ancient Greek word that means the courage to speak the truth, fearless speech, and a critical attitude.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day, we have witnessed the individual is in a difficult situation in which a person was hard to express one’s own opinion due to the restriction of state ideology, political and historical issues. This work shows that as assuming that each character is to practice “Parrhesia”, they state differently depending on their position under the same situation. It is connected to the concept of the ‘Rashomon Effect’ which appeared as a unique narrative structure in the movie, Rashomon by Akira Kurosawa. Four characters in the video lived in four nations that were formed by ideological confrontations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after the Second World War. Four characters are as follows.

A. The person who experienced the Soviet Union system.
B. The Chinese intellectual who underwent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C. The North Korean agent who was sent to the South.
D. The South Korean student activist who visited North Korea.

These characters have in common that a person’s life was sacrificed or completely changed by the decisions of the country. This work is not only for the story of people who lived in a certain time, but it is also implicit in someone’s voice that is still erased and dispersed by the change of power in ideology and the nation.

*This work was inspired by Michel Foucault, Discours et vérité: Précédé de La parrêsia. 2016 and Rashomon. directed by Akira Kurosawa. 1950.

항해하는 말들; 시인과의 대화, 허수경
Sailing Words; A dialogue with the poet, Huh Sukyung

Text installation, Print on linen fabric, 12 pieces, 70 X 270cm, 2019

안유리에게 언어, 문학적 영감을 준 시인 허수경과의 서신 교환을 토대로 구성한 작업이다. 20년 가까이 독일에 거주하면서 시를 쓰고 고고학을 연구하는 허수경의 문장들은 고대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독일에서 서울로 전송되었다. 안유리는 서울에서 히말라야, 태국, 암스테르담을 이동하면서 시인의 문장 속 세계를 함께 여행했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다시 쓰이고 이어졌다. 이 작업은 2015년, 텍스트 설치와 3채널 영상설치로 두 차례 선보였다. 2018년 시인 허수경은 타계했다. 시인의 육신은 지상에 더는 함께하지 않지만, 그녀가 남긴 언어는 여전히 생생히 우리 곁에 남아 맴돈다. 올해 10월, 안유리는 시인의 1주기를 기념하고자 이 작업을 새롭게 제작했다.

This work is based on the letters exchanged between Yuri An and the poet Huh Sukyung, whom she considers her literary inspiration. For nearly 20 years, Huh Sukyung has been living in Germany, writing poems and studying archaeology. Her poems traverse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delivered from Germany to Seoul. Yuri An traveled the poet's world through her words during a long trip from Seoul to the Himalayas, Thailand and Amsterdam. In this process the story has been re-written - continued beyond time and place. The work was presented twice in 2015 with text installation and three-channel video installation. In 2018, poet Huh Sukyung passed away. The poet's body is no longer with us on earth, but the language she left still lingers alive by us. In October of this year, Yuri An created the work to commemorate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poet's death.

영상 촬영 / 편집 : 유성원(출판사 난다)

다섯 평 사전 : 안유리 글모음 2014-2019
A dictionary five meters Squared 2014-2019

Text installation, Print on the paper, 26 pieces, 21 X 29.7cm, 2019

2021
2022
2023
포촘킨 스터디 2. 베를린에서 도문까지 : 물뿌리로 가는 길 Potemkin Study 2. From Berlin To Tumen : The Way to the Origin of a Million Rivers (excer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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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촘킨 스터디 2. 베를린에서 도문까지 : 물뿌리로 가는 길
Potemkin Study 2. From Berlin to Tumen : The Way to The Origin of a Million Rivers

Single channel video, 11min 35sec, 2019 

포촘킨 스터디 시리즈의 두 번째 작업으로, 1편에서는 한 도시 속에 자리한 상이한 두 장소-종묘와 대림동-를 통해 서울을 읽는 시도 였다면, 2편은 분단과 냉전의 기억을 가진 두 개의 도시를 공통의 서사를 통해 조망한다. 그 두 장소는 독일의 베를린, 중국의 도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이데올로기에 의해 영토가 나뉘고 신흥국가들이 탄생했다. 베를린이 분단의 상징적 장소라면, 도문은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한반도 최북단 지역을 흐르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이 나뉘는데, 중국 쪽 국경 도시가 바로 도문이다. 두만강은 ‘만 가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도문은 두만강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두만강의 뜻인 ‘물의 근원’을 가리키는 여러 말 중, ‘물뿌리’라는 단어가 있다. 남한에서는 더는 사용하지 않으나 북한어 사전에는 수록되어 있다. 물과 뿌리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뿌리라는 것은 본디 하나의 장소에서 정박해야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물이 내로, 내에서 강으로, 다시 바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갈래와 시작점을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최근 몇 년 사이, 두만강 일대는 통일 전 베를린이나 DMZ 인근지역처럼, 긴장감이 흐르는 도시로 바뀌었다. 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두만강은 삶의 방향과 뿌리를 옮기는 시작점이 되었다. 30년 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나,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분계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물줄기를 가둘 수는 없어도, 강을 사이로 이념이 충돌하고 공포가 넘나든다. 이것은 분단의 상흔과 애수의 장소로써 두 도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의 과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현재인 것처럼, 선형적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도시의 이야기이다. 그곳의 다리는 끊겼으나, 강은 여전히 흐른다. 

This video is the second work as a series of Potemkin Study projects since I began in 2017. In the first video, I attempted to reinterpret Seoul through two different places: ‘Jongmyo Shrine and Daerim-dong’. This new work is about two different cities that have memories of division and the cold war in common. These two cities are Berlin in Germany and Tumen in China.

 

After the second world war, several countries divided territory by ideology, and the new countries were established as a result. Berlin is often referred to as the symbol city of division, Tumen has a much more complicated history. Tumen River flows the most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where is the border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 Tumen is the name of a place that originated from Tumen River that means the origin of a million rivers. Among many words that means ‘the source of water’, there is the word ‘Mool(water) Bboori’(root or origin) in Korean. It is a North Korean word, no more used in South Korea. This combination of these words seems to be contradicting. Roots or origins can be found in a fixed one place, but water is a different case. As if a small stream to form a river and the river flows into the sea, we are hard to find the one initial point of water. In recent years, tension is increasing around the Tumen River like Berlin before the unification and DMZ in Korea. As the number of people who escape from North Korea is rapidly increasing, Tumen river becomes a starting point of changing the origin of life. Although 30 years ago, the Berlin wall already fell,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in the Korean peninsula still exists. There is no way of confining a stream of water in one place, ideological conflict and fear take a hold on the river between. This work is not the story about two cities as the place of sorrow and wounds of division. As if someone’s past still can be like the present of another person, this video is a tale of two cities that lost its way in the linear time base. Even though the bridge has collapsed, the river still flows, there.

2018
Rogu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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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별들
Rogue Stars

3-channel video projection, 16min 16sec, 2018

2016년부터 시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로, 일련의 비디오 시리즈 <월강>, <몸>, <말>, <소리>의 확장판이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조선인의 이주 기록을 살펴보다가, 여전히 우리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조선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렇듯 첫해에는, 조선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역사와 정치적 변화의 굴레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입고”, “벗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이후 2년 동안 리서치를 지속 하면서, 디아스포라의 공통적 과제-고국과 모국 사이의 괴리감, 동포와 외국인 사이에서 자리 잡기-을 보다 깊숙이 마주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결과물은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 사이를 오가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번 작업을 통해서 연변을 넘어,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 조선족의 위치와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국 국가와 민족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금 건네본다.

Yuri An’s Rogue Stars is a documentation of Joseon-jok(ethnic Koreans in China), whom amongst other Korean immigrants dispersed from the Korean peninsula to other parts of the world in the late 19th century, continues to speak and write in Korean language. Following the migration route of Joseon-jok, the film is set primarily in the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where stories of ‘discrepancy between homeland and motherland’, ‘coming to terms with the self-identity between the brother/sister and the foreigner’, and other consequences shared by diasporic communities are told. Ultimately, the project raises the question of the meaning of nation and ethnicity for us in the 21st century.

2017
Potemkin Study 1.Seoul : Tower of Silence, Fire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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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촘킨 스터디 1. 서울 : 침묵의 탑, 불의 집
Potemkin Study 1. Seoul: Tower of Silence, Fire Temple

Single channel video, 7min 35sec, 2017

18세기 중엽, 러시아의 절대군주 예카테리나 2세가 자신의 영토 중 크림반도를 시찰하려고 하자, 당시 총독이었던 포촘킨이 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잘 정돈된 마을의 풍경을 그린 대형 가리개로 낙후된 실제 모습을 가렸던 일이 있다. 이후 ‘포촘킨 파사드’는 원래의 모습을 가린 채 선별된 전시적 풍경을 가리키는 비판적 용어로 쓰인다.

‘포촘킨’이라는 동명을 둘러싼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은 영화 <전함 포촘킨>에서 영화문법 중 하나인 ‘몽타주’를 적극적으로 실험하여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선보였다. ‘전함 포촘킨’에서 몽타주는, 대조적인 쇼트들을 이어붙여 선형적 시간과 일치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서사 흐름을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 이번 작업은 ‘포촘킨(Potemkin)’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둘러싼 두 개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전시화된 풍경-포촘킨 파사드-과 이미지와 소리의 재조립을 통해 구성된 제3의 시공간-전함 포촘킨-이라는 두 가지 수사학을 통해, 서울의 두 장소를 재조망하는 작업이다.

 

<포촘킨 스터디 1. 서울 : 침묵의 탑, 불의 집>에서는, 종묘와 대림동을 중심으로 서울을 읽는 작업을 시도했다. 50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하나의 성씨, 즉 ’이씨 왕조’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들의 위패를 모신 성소(聖所)인 ‘종묘’. 이와 대조적으로, 산업화와 신 자유주의 경제의 물결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물자와 사람들이 새로운 풍경을 이루는 ‘대림동’. 서울에는 한 번도 주인이 바뀐 적이 없는 집과, 제자리를 한 번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했다. 떠난 사람들의 집과 떠날 사람들의 집, 정주민과 이주민, 그 둘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모습을 그려본다. 결국, 이것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전시적 풍경일까, 모든 장소로부터 소외되는 실존적 외부성(existential outsiderness)을 선택한 것일까. 이번 프로젝트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when Catherine the Great who was an empress of Russia planed a tour of Crimea, a Russian minister Potemkin, in order to gain her’s favor, he hid the actual village landscape by the large screen which was drawn the fake, but plausible scenery. Later, the ‘Potemkin facade’ used to be known as a satirical architectural term, it signifies the selected landscape by covering the original one.

There is another story of ‘Potemkin. Early 20th century, a Russian filmmaker, Sergei Eisenstein did study actively “montage” that is the grammar of a film, it promoted him to present a new style. In his film, Battleship Potemkin, montage was used for a purpose that educes the new concept by assembling contrasting two scenes, instead of accumulating the meaning of narrative structure by just combining each shot. It is the way of an intentional collision against the natural narrative flow. The beginning point of my new work is the curiosity of surrounding two-story of the name of Potemkin. I tried to explore and read two different places in Seoul through two aspects: Selected landscape(Potemkin facade) and the Third Time and Place that is comprised of reassembled images by montage. (Battleship Potemkin)

 

This video, Potemkin Study 1. Seoul: Tower of Silence, Fire Temple, I tried to study Jongmyo and Daerim-dong in Seoul. Jongmyo is a shrine and a symbolic place of the Joseon Dynasty that was ruled by only people with the family name Lee for 500 years, at the one place. In contrast, Daerim-dong forms the new landscape by ceaselessly moving supplies and people due to industrialization and the dominance of neoliberalism. In Seoul, there is a home that is never changed the house owner also people who never got their own place. A French philosopher, Gabriel Marcel said, “An individual is not distinct from his place. He is his place.” I pictured the city landscape that is composed of immigrants and natives, the home where people left or are ready to leave someday. Is that selected landscape we made? or is that a choice by the existential outsideness which alienated from all the place? I started this project with these question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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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월강 越江 Cross a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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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강(越江)
Cross a River

Single channel video, 1min 08sec, 2016

Body

Single channel video, 4min 17sec, 2016

​말
Words

Single channel video, 4min 08sec, 2016

소리
Sound

Single channel video, 6min 29sec, 2016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

Digital print, 25X17.6cm, 2016

Yurian_installation view_01.jpg
팔 집
A House to Sell

Digital print, Variable size, 2016

2015
Installation View) Sailing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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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하는 말들; 시인과의 대화, 허수경
Sailing Words; A dialogue with the poet, Huh Sukyung

3-channel video installation, 13min 31sec, 2015

추수할 수 없는 바다 The Unharvested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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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할 수 없는 바다
The Unharvested Sea

Single channel video, 9min, 2015

<유동하는 땅, 떠다니는 마음> 프로젝트의 연작이자, 테셀(Texel)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에 진도를 추가하여 새롭게 제작한 비디오이다. 실제로, 작가가 네덜란드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목도한 몇 가지의 사건들-세월호, 말레이시아 항공 격추사건 등-을 통해 ‘귀환할 수 없는 존재들’, ‘닻을 내릴 수 없는 마음’에 관한 작가 본인의 경험에 반추하여 작업으로 이어갔다. 집을 떠나 오랜 시간 떠돌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오뒷세우스, 핸드릭 하멜)과 떠나간 사람들의 자리에서 기도와 제를 올리는 존재들(뽕할머니, 영등할매)이 등장하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현재를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다. 

This video is a sequel to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having added a new place Jindo island in the voyage from Texel to Jeju. When the artist decided to return to Korea, she encountered several accidents - the Sewol Ferry Tragedy and the Malaysia Airlines plane disaster - which prompted her to continue the project about 'beings beyond return' and the 'heart that cannot cast anchor'. This work is a reinterpretation of the present through myths and legends, which feature two different characters: the wanderer who returns home after a long time (Odysseus, Hendrick Hamel) and the one that prays for the disappeared people (Grandmother Bbong, Grandmother Yeongdeung). 

2014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From Texel To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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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땅, 떠다니는 마음; 테셀에서 제주까지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From Texel to Jeju

Single channel video, 7min, 2014

이 프로젝트는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동안 우연히 북해의 한 섬 테셀(Texel)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테셀(Texel)은 400년 전 제주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항해를 출발했던 장소다. 안유리는 네덜란드로 오기 전 제주에 관한 작업을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왔다. 누군가가 출발했던 장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착지로 이어지는 과정을 두고 작가는 상상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방인으로서 낯선 장소에서 겪게 되는 상황들, 그중에서도 말과 언어 즉, 모국어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과정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구성했다. 양서류가 물에서 뭍으로 삶의 공간을 이동하는 가운데 진화의 잔재로 남은 ‘딸꾹질’처럼, 안유리 본인이 모국어에서 외국어로,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옮아가면서 새롭게 변화하고 체득한 호흡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While residing in the Netherlands, this project began with a chance visit to Texel, one of the islands in the North sea. Texel was the departure point for the Dutch trader Hendrick Hamel, who was stranded in Jeju(Korea) nearly 400 years ago. Before moving to the Netherlands, Yuri An wrote a book about Jeju as her last project in Korea.

Someone’s point of departure may become another's point of arrival. It is in this process that the artist begins her imaginary journey. This story is composed from the artist's own experience of being an outsider in a foreign country, focusing on the realization of oneself amid the absence of the mother tongue.

It is believed that the hiccup is the evolutionary remnant of our amphibian past, caused by the need to adapt to a new habitat. Yuri An's story is told anew, with the breathing technique she acquired through her adaptation to a new language, and a new place.

​유동하는 땅, 떠다니는 마음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Slide projection, 20pieces, 2014

Installation View)whispering th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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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pering Thread

Video installation on Textile, 2X16M, 2014

2013
동시성의 상대성
Relativity of Simultaneity

Single channel video, 2min 46sec, 2013

Address Unknown

Video installation, Variable size, 2min 25sec, 2013

호루스의 눈
Eye of Horus

Video installation, Variable size, 1min 40sec, 2013

I am your ear, I am your radio

Sound poem, 2min 06sec, 2012

2012
2011
화해할 수 없는 시간
Irreconcilable Time

Poem and Sound installation, 3min 24sec, 2011

Irreconcilabl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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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dead.jpg
너의 기억이 사라진 시간만큼 나는 죽어있었다
I was dead as much as your memories were gone

Video installation, Variable size, 4min 21sec, 2011

Bio

BIO

Yuri An_2023.jpeg

Photo by Sung Jaeyun

안유리는 주로 역사와 정치적 굴레 속에서 개인의 삶이 공동체와 국가에 의해 규정되고 변모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고 혹은 충돌하는지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사라진 말과 이야기들에 귀 기울였다. 텍스트, 비디오, 사운드처럼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매체에 담아 표현하고 있고, 2016년부터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4년 헤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첫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15)를 열었고, 이후 두 번째 개인전 <항해하는 말들>(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5),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 유망예술 시각예술분야에 선정되어 세 번째 개인전 <돌아오지 않는 강>(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6)을 열었다. 주요 그룹전으로 <Neo Geography 1>(뉴샤텔 예술센터, 뉴샤텔, 2017), <Neo Geography 2>(탈영역 우정국, 서울, 2017),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2018), 경기도미술관-가오슝미술관 교류 주제전 <Moving & Migration>(가오슝미술관, 대만 +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 안유리+허광표 2인전 <모두말하기: 파레시아>(청주시립대청소미술관, 청주, 2020), <사랑을 위한 준비운동>(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21), <아트스펙트럼 2022>(리움미술관, 서울, 2022), <제4회 아시아필름앤비디오 포럼>(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 등이 있다.

Yuri An is interested in how the lives of individuals are defined and transformed by communities and nations amidst historical and political shackles. She listened to lost words and stories while exploring how past events are connected or collided with the present phenomena. She uses media that can move freely in space and time, such as text, video, and sound, and has been working on the “Korean Diaspora Project” since 2016. She graduated from Gerrit Rietveld Academie in Amsterdam, the Netherlands, and came back to Korea in 2014.

 

Yuri An was selected as <Emerging Artists 2015 of Seoul Museum of Art>, then held her first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Art Space Pool, Seoul, 2015). In the same year, she held second solo exhibition Sailing Words(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5). Her third solo exhibition River of No return(Seoul Art Space Seogyo, Seoul, 2016) held due to support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She participated in several group exhibitions: Neo Geography 1(Centre d'art Neuchâtel, Switzerland, 2017), Neo Geography 2(Post Territory Ujeongguk, Seoul, 2017), How little you know about me(MMCA Seoul, 2018), Moving & Migration(Kaohsiung Museum of Fine Arts, Taiwan +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Ansan, 2019), Yuri An + Xu Gunagbiao_To Speak Everything: Parrhesia(CMOA Daecheongho Museum of Art, Cheongju, 2020), as the Practice of Learning(Nam-Seoul Museum of Art, Seoul, 2021), ARTSPECTRUM 2022(Leeum Museum of Art, Seoul, 2022), 4th Asian Film & Video Art Forum(MMCA Seoul, 2024)

CV

CV

안유리

1983년 서울 생

yurian0824@gmail.com

 

 

학력

2014      VAV(Audio-Visual), 헤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개인전

2016      돌아오지 않는 강,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5      항해하는 말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5      추수할 수 없는 바다,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이인전

2020      안유리+허광표 <모두 말하기: 파레시아>,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전시지원 공모 선정전 《절묘한 균형》,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단체전 및 스크리닝(selected)

2024      제4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2024      신화 :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뮤지엄 원, 부산

2024      보더리스 시네마,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 1, 인천

2024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디아스포라 단편>, 애관극장, 인천

2024      제26회 나카노시마 영상극장 「하늘, 경계없는」 2024년 3월 17일,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오사카

2023      약장수와 약속의 땅, 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3      2023 신소장품전 《그리고 우리는 거의 잃어버렸다》 ,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2023      더프리뷰 성수 with 신한카드 연계프로그램 스포트라이트, SFactory D동, 서울 

2023      시의 정원: Poetic Paradise, 전남도립미술관, 광양

2022      드리프트 서울 심포지엄 2022, 윈드밀, 서울

2022      낯설고 낯선, 예술자유구역 송도, 송도 더 제니스 128호, 인천

2022      2022 MMCA 아시아 프로젝트 서울 그리고 카셀–우정에 관하여, 온라인 메타버스 플랫폼

2022      THE STREM: Screening/Talk_#32 안유리(솔로 스크리닝), 신촌극장, 서울

2022      아트스펙트럼 2022, 리움미술관, 서울
2022      2020-2021 신소장품전: 사유의 방법,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21      지도 위 수많은 축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 II, http://www.welcome-to-ogasawara.info, 서울

2021      숨바꼭질: 눈길, 귀엣말, 스페이스 소, 서울

2021      사랑을 위한 준비운동,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21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 http://www.welcome-to-ogasawara.info, 서울

2020     2020 무브 온 아시아_스크린 라이프 관찰기, 아마도 예술공간+따세대 살롱, 서울

2019      OVNi 페스티발 2019, OVNi at the hotel, 니스, 프랑스

2019      말 그림자: More than Words, 성남큐브미술관 반달 갤러리, 성남

2019      번외편: A-side-B, 금천예술공장, 서울

2019      서재의 유령들, SeMA 창고, 서울

2019      퍼폼 2019: Linkin-out, 일민미술관, 서울

2019      자유공간, 해남예술회관, 해남
2019      퍼폼 2019: Linkin-ou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9      그럼에도, 역사는 계속된다, 주홍콩한국문화원, 홍콩
2019      경기도미술관-가오슝미술관 교류 주제전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      2019 풀이 선다,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19      경기도미술관-가오슝미술관 교류 주제전 <Moving & Migration>, 가오슝미술관, 가오슝, 대만

2018      퍼폼 2018 <DATAPACK>, 일민미술관, 서울
2018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14,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2018      이토시마 국제 예술 축제, 이토시마 아트 팜, 후쿠오카, 일본
2018      아직 살아 있다,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18      비디오 랜드스케이프, 토탈미술관, 서울

2018      비디오 쇼룸, 2018 퍼폼 디지팩 아티스트, 소쇼룸, 서울

2018      2018 아시아 프로젝트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2018      이층 異層, 프로젝트 스페이스 공공연희, 서울

2017      끝없는 밤,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2017      Neo Geography 2, 탈영역 우정국, 서울

2017      Neo Geography 1, CAN(Centre d'art Neuchâtel), 뉴샤텔, 스위스

2017      윈도우 사이트 Vol 1: CJAS 콜렉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7      2017  풀이 선다,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17      GongXi, GongXi 2017; 朋友的力量, 보스토크, 서울

2016      99℃  Showcase Exhibition,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6      제38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2016      자유공간, 쉐마미술관, 청주

2016      24개의 낮, 25번째 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5      스크리닝: 바디 랭귀지스, 문자발명가들:세계문자심포지아 2015, 씨네코드 선재, 서울

2015      On The Island, 갤러리 버금, 제주

2015      The Power of Art, 두만강 문화종합전시관 2F, 중국 길림성 도문시

2015      워밍업,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4      [S]elected Show, Castrum Peregrini, 암스테르담

2014      Constant Companion, the Oude Kerk, 암스테르담

2013      Beurs van Kleine Uitgevers 2013, Paradiso, 암스테르담

2013      The Tokyo Art Book Fair 2013, 동경

2013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갤러리 상상마당, 서울

2012      Orbit, Orgelpark, 암스테르담

2012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갤러리 상상마당, 서울

2012      Radio Station: FIRE IN CAIRO, 암스테르담

2011      The 3rd Unlimited Edition, 플래툰 쿤스트할레, 서울

2011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갤러리 상상마당, 서울

2005     제3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서울

 

 

수상경력 및 레지던시

2022     아트스펙트럼 2022 선정작가, 리움 미술관, 서울

2021      파널리스트, 한네프켄재단-루프 바르셀로나 비디오아트 프로덕션 어워드 2021, 루프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스페인

2020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전시지원 공모 선정
2019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2018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2016      제38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중앙일보, 서울

2016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 유망예술지원사업 99℃ 시각예술분야 선정작가, 서울

2015      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 지원 프로그램 선정작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5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2014      The Nominees in the Category of Thesis of GRA Awards, 헤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 암스테르담

 

작품소장

​​경기도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서서울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강연과 토크

2024      작가와의 대화, <2024 제4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 wih 채은영 기획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2024      강연, 전주-멜버른 예술인 교류 프로젝트 <모종의 모임>, 온라인

2024      강연, [PEER-UP!] Build-up 1 (창제작), 광주미로센터 미로극장, 광주

2024      작가와의 대화 <왜 미술 작가는 영화제로 오는가>,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 G1, 인천
2023      작가와의 대화 <약장수와 약속의 땅>, 아트 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3      작가와의 대화, 하자모난돌 학교, 하자센터, 서울
2023      작가와의 대화 <시의 정원> with 김민정 시인, 전남도립미술관, 광양
2023      강연, <예술을 위한 아카이브> 포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과젠더연구소, 한예종 영상원
2021       작가와의 대화, <오가사와라의 추억> 프로젝트 활동 공유회, 온라인
2019       아티스트 토크, 금천예술공장, 서울
2019       [항해하는 말들: 허수경 시인과의 대화], 아티스트 안유리와의 오픈 토크 with 김민정 시인, 더북소사이어티, 서울
2019       작가와의 대화 <아직 살아 있다>,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18       강연, <아시아, 아시아>,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술제, 홍익대학교
2018       작가와의 대화 <비디오 랜드스케이프>, 토탈미술관, 서울
2018       작가와의 대화, 아르코미디어 비평총서 시리즈 - <미디어 챕터 1> 연구프로그램 프리젠테이션,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8       작가와의 대화, MMCA 레지던시 세미나 03, 국립현대미술관 디지털정보실 라운지 DAL, 서울
2016       전시 <돌아오지 않는 강> 라운드 테이블: 조선족 미술인들과의 대화,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6       작가와의 대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5       작가와의 대화 <추수할 수 없는 바다>,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기타경력

2022.03~05            국립현대미술관 청소년 문화 다양성 교육 프로그램 <어떤 시선> 강사

2019.05~2020.01    한국교육개발원 탈북학생 잠재역량강화 프로그램(HOPE 8기) 멘토

2017.11~2024.07     서울시립청소년미래진로센터 하자 오디세이학교 강사

2017.04~10             서울문화재단 청소년 창의예술교육사업 예술가교사 TA

2006.11~2010.04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Yuri An

Born in 1983 in Seoul, Korea

yurian0824@gmail.com

 

 

Education

2014        VAV(Audio-Visual) Department of Gerrit Rietveld Academie, Amsterdam, The Netherlands

 

 

Solo Exhibition

2016        River of No Return, Seoul Art Space Seogyo, Seoul

2015        Sailing Words,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5        The Unharvested Sea, Art Space Pool, Seoul

Dual Exhibition

2020        Yuri An + Xu Gunagbiao <To Speak Everything: Parrhesia>, 2020 CMOA Daecheongho Competition Exhibition Exquisite Balance, CMOA Daecheongho Museum of Art, Cheongju

 

                                                                     

Screening & Exhibition(selected)

2024       4th Asian Film & Video Art Forum, MMCA Seoul, Seoul
2024       MYTH: The Beginning Story, Museum 1, Busan

2024       Undoubtful Prayers, Abri Atelier, Jangheung

2024       Borderless Cinema, G1 Exhibition Halls at Incheon Art Platform, Incheon

2024       The 12th Diaspora Film Festival <Diaspora Shorts>, Ae Kwan Theater, Incheon

2024       The 26th Nakanoshima Screen 「Sky, Without Border」 March 17, 2024, National Museum of Art, Osaka

2023       Snake Oil Salesmen and Promised Land, Art Space Boan, Seoul

2023        And We Have Almost Lost, Jeju Museum of Contemporary Art, Jeju

2023        THE PREVIEW Seongsu with ShinhanCard program Spotlight, SFactory D, Seoul

2023        Poetic Paradise, Jeonnam Museum of Art, Gwangyang

2022        Drifts Seoul Symposium 2022, WINDMILL, Seoul

2022        The Hyperobject Invasion, Arts District, Songdo, 128 1F Songdo The Zenith, Incheon

2022        2022 MMCA Asia Project in Seoul & Kassel: Terracotta Friendship, Online Metaverse-based virtual exhibition

2022        THE STREAM: Screening/Talk_#32 Yuri An, Theatre Sinchon, Seoul

2022        ARTSPECTRUM 2022, Leeum Museum of Art, Seoul

2022        2020-2021 CMOA New Collection: The Way of Thinking, Cheongju Museum of Art, Cheongju

2021        A Few In Many Places—Welcome to Ogasawara II, http://www.welcome-to-ogasawara.info, Seoul
2021        Hide and Seek: a Peek, a Whisper, SPACE SO, Seoul

2021        as the Practice of Learning, Nam-Seoul Museum of Art, Seoul

2021        We are from the Sea, http://www.welcome-to-ogasawara.info, Seoul
2020        2020 Move on Asia_Observing Screen Life, Amado Art Space + Tasse De Salon 4F Media Room, Seoul
2019        OVNi festival 2019, OVNi at the hotel, Nice, France

2019        More than Words, Seongnam Cube Art Museum BanDal Gallery, Seongnam

2019        Prequel: A-side-B, Seoul Art Space Geumcheon, Seoul
2019        Spectres in the Library, SeMA Storage, Seoul

2019        PERFORM 2019: Link-out, Ilmin Museum of Art, Seoul
2019        Free Space, Haenam Culture & Art Center, Haenam
2019        PERFORM 2019: Link-out, Asia Culture Center, Gwangju
2019        Nevertheless, History Continues, Korean Cultural Center in Hong Kong, Hong Kong
2019        Moving & Migration,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Ansan

2019        2019 Pool Rising, Art Space Pool, Seoul
2019        Moving & Migration, Kaohsiung Museum of Fine Arts, Kaohsiung, Taiwan
2018        Perform 2018 <DATAPACK>, Ilmin Museum of Art, Seoul

2018        MMCA Residency Goyang Open Studio 14, MMCA Residency Goyang

2018        Itoshima International Art Festival, Itoshima Arts Farm, Fukuoka, Japan
2018        Still Alive, Cheongju Museum of Art, Cheongju

2018        Video Landscape, Tot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2018        The video showroom with Perform 2018 Datapack Artists, Soshoroom, Seoul

2018        2018 Asia Project: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MMCA Seoul, Seoul

2018        Another Floor, Project Space 00yeonhui, Seoul

2017        Endless Night, CMOA Daecheong Ho Museum of Art, Cheongju

2017        Neo Geography 2, Post Territory Ujeongguk, Seoul

2017        Neo Geography 1, CAN(Centre d'art Neuchâtel), Neuchâtel, Switzerland

2017        Window Site Vol 1: CJAS Collection,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7        2017 Pool Rising, Art Space Pool, Seoul

2017        GongXi, GongXi 2017; 朋友的力量, Vostock, Seoul

2016        99℃ Showcase Exhibition, Seoul Art Space Seogyo, Seoul

2016        38th Joongang Finearts Artist, Sejong Museum of Art, Seoul

2016        Free Space, Schema Art Museum, Cheongju

2016        24 Night, 25th Day,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5        Screening & Talk, Body Languages, Script Inventors: World Script Symposia 2015, CineCode Sonje, Seoul

2015        On The Island; Chengju Art Studio Bridge Project, Gallery Burgem, Jeju

2015        The Power of Art, 2F The Tumen River Art Centre, Tumen City Jilin Province, China
2015        Warming up,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4        [S]elected Show, Castrum Peregrini, Amsterdam

2014        Constant Companion, the Oude Kerk, Amsterdam

2013        Beurs van Kleine Uitgevers 2013, Paradiso, Amsterdam

2013        The Tokyo Art Book Fair 2013, Tokyo

2013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SangsangMadang Gallery, Seoul

2012        Orbit, Orgelpark, Amsterdam

2012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SangsangMadang Gallery, Seoul

2012        Radio Station: FIRE IN CAIRO, Gerrit Rietveld Academie, Amsterdam

2011        The 3rd Unlimited Edition, Organized by YOUR MIND and PLATOON KUNSTHALLE, Seoul

2011        ABOUT BOOKS: INDEPENDENT BOOK MARKET, KT&G SangsangMadang Gallery, Seoul

2005        The 3rd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Seoul

 

Awards and Residency

2022        ARTSPECTRUM 2022 selected artists, Leeum Museum of Art, Seoul

​2021        Finalists, Han Nefkens Foundation-Loop Barcelona Video Art Production Award 2021, in collaboration with Fundació Joan Miró

2020        Grant for exhibition 2020 CMOA Daecheong Ho Museum of Art, Cheongju

2019        Seoul Art Space Geumcheon residency
2018        MMCA Residency Goyang,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2016        38th Joongang Finearts Artist, Joongang Ilbo, Seoul

2016        Art Support Program 99, Seoul Art Space Seogyo,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Seoul

2015        Emerging Artists, Seoul Museum of Art, Seoul

2015        Artist in Residency,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2014        The Nominees in the Category of Thesis of GRA Awards, Gerrit Rietveld Academie, Amsterdam

Collection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Museum of Contemporary Art Busan

Seo-Seoul Museum of Art

Seoul Museum of Art

Jeju Museum of Contemporary Art

Cheongju Museum of Art

Lecture and Talk

2024      Artist Talk, Asian Flim&Video Art Forum 2024 with the curator Eunyoung Chae, MMCA Seoul, Seoul
2024      Lecture, Jeonju-Melbourne Artist Exchange project <Seedling Session>, Online
2024      Lecture, [PEER-UP!] Build-up 1 (Creation), Miro Center, Gwangju
2024      Artist Talk, Why Do Artists Come to the Film Festival?, Incheon Art Platform Gallery 1 (G1), Incheon
2023      Artist Talk, Snake Oil Salesmen, and Promised Land, Art Space Boan, Seoul
2023      Lecture, haja MONANDOL school, haja center
2023      Artist Talk, Poetic Paradise, Jeonnam Museum of Art, Gwangyang
2023      Lecture, Archive for Arts Forum, Arts and Gender Research Institute,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Seoul

2021      Artist Talk, Welcome to Ogasawara project presentation, Online
2019      Artist Talk, Seoul Art Space Geumcheon, Seoul
2019      Artist Talk, Sailing Words; A dialogue with the poet, Huh Sukyung with Poet Minjung Kim, The book Society, Seoul
2018      Artist Talk, Still Alive, Cheongju Museum of Art, Cheongju
2018      Lecture, Asia, Asia Forum of Art History and Theory department, Hong 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Seoul
2018      Artist Talk, Video Landscape, Total Museum, Seoul
2018      Arko Media Critique Series - Media Chapter 1, presentation, Arko Art Center, Seoul
2018      Artist Talk, MMCA Residency Seminar 3. MMCA Seoul lounge DAL, Seoul
2016      Artist Talk, Round table of exhibition River of No Return with Korean Chinese Artists, Seoul Art Space Seogyo, Seoul
2016      Artist Talk, Cheongju Art Studio, Chengju
2015      Artist Talk, The Unharvested Sea, Art Space Pool, Seoul

Career

2022.03~05            Lecturer, MMCA Cultural Diversity Education program

2019.05~2020.01   Mentor, strengthening the capacity program for North Korean refugee students(HOPE 8), KEDI

2017.11~2024.07   Lecturer, Odyssey haja school, haja center

2017.04~10            Teaching Artist,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2006.11~2010.04   Advisor and video creator, haja production school, haja center

Artist Statement

Artist Statement

내게 말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물과 뭍이 만나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말들은 대지에서 바다로 나아가려는 물줄기처럼 언제나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울부짖는 휘파람과도 같았다.

그녀의 말을 먹고 자란 나는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녀의 세계밖으로 나간다면 어딘가에 새로운 말들이 사는 집이 있을거라 기대했다.

 

낯선 말들의 집앞에 이를때마다 생각했다. 그들의 입속에도 땅과 바다의 소리가 함께 있었다.

사라져가는 말들과 기억되길 원하는 말들이 떠올랐다 부서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풍화된 말들을 입속에 품은채 살아가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의 말이 지나간 자리에 길이 생긴다. 나는 그 길이 불러주는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먼곳에서 먼곳을 부른다. 말들은 집으로 향하는 길을 수놓는다.

당신의 이름을 따라 계속 걷는다.

집으로 가기위해, 나는 노래한다.

2014, 안유리

 

She who taught me my first words, was born in the village where water meets land.

Her words sounded as if it were a stream that wanted to go forward from the earth to the sea,

whistling to someone who is not here.

I who was raised by her words, always desired to leave to someplace.

 

When I walked out from her world, I expected to find the house of new words.

Whenever I reached the house of unknown words, I listened to people’s voice.

There was the sound of the land together with the sound of the sea.

Dying words, words that wanted to be remembered, were floating and coming apart.

People were living with the weathered words in their mouth.

Sometimes, their words would leave a trail. I listen to the song that the path sings for me.

The song is calling from afar to faraway. The words embroider the way  home.

Walking along your name. To go home, I sing a song.

2014, Yuri An

이 도시에서 오래된 책이 태어났다.

본래 두 권으로 만들어진 책의 한 권은 이국의 도시로 떠난 지 오래이며

또 다른 한 권은 이미 사라져 더는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남겨진 문장들 속에서 사라진 문장들을 더듬는다.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 ‘체(體)’. 그 자리에 따라 생성되는 파동, ‘용(用)’.

애초부터 이 책은 말들이 떠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말들. 하지만 볼 수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 잠시 우리 앞에 세계를 그려내는 불빛.

내게 ‘체(體)’와 ‘용(用)’은 떠나간 말들이 남겨놓은 그림자를 좇아

환등(幻燈)의 세계로 항해하는 말들이다.

언젠가 사라져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빛의 말들이다.

 

<항해하는 말들> 작가노트, 2015, 안유리

 

Born in this city is an ancient book.

Originally a two-volume book, the first one disappeared without a trace,

the second one too, is long gone, away in a distant city.

I trace the vanished verses in the residue it left behind.


‘體’(tǐ) is the space that cannot be expressed through language and letters.

‘用’(yòng), the wave created in that space.

Perhaps, from the beginning, this book was made for the departure of words.

Words born to disappear, naming invisible things, a flicker of light that momentarily shines the world onto us.

For me, ‘體(tǐ)’ and ‘用’(yòng) are words sailing towards a world of phantasmagoria,

chasing after the shadows left behind by those already absent.

Bound to disappear, but eternally present as words of the light.

 

Artist Statement for Sailing Words, 2015, Yuri An

과경(跨境)의 몸들, 접경(接境)의 말(言)들, 망경(忘境)의 소리

 

저기 두 사람이 있다.

일평생 자신이 꿈꾸는 세계의 말(言)들을 좇았으나 단 한 번도 그곳에 닿지 못했던 사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세계의 말(言)이 사는 세계에 몸이 묶였던 또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을 넘어, 또 한 사람은 말들을 건너 그곳으로 사라졌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데려간 세계의 말(言)들이 궁금했었다.

 

한때 그곳은 이름도 사람도 없던 땅이었다.

사람들이 건너가기 시작하자 그곳은 사잇섬, 만주, 연변이라는 이름을 입고 벗었다.

새로운 이름을 입고 벗어야 했던 땅에 사는 사람들도

조선인, 황국신민,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입고 벗었다.

몸들은 새로운 몸을 낳고, 말들은 새로운 말을 낳았다.

오래전 두 사람이 건너간 세계의 소리를 좇아

나는 건넜다.

 

2016, 안유리

 

 

Bodies beyond the border, Words on the border, Sounds of a vanished land

 

There are two people.

One, who spent his entire life chasing after the words of the world he dreamt of, and never got there.

The other, who happened to be bound to the world of foreign words.

One, crossing over his own body. The other, crossing the words, disappeared into that place.

For a long time, I have been curious about the words of the world that took them away.

 

Once upon a time, it was an uninhabited, nameless land.

As people started to come and go, it took on and took off the names, “Gando”, “Manchuria”, and “Yanbian”.

People from this land also took on, and took off names such as “Joseon people”, “Japanese Loyal Subject” and “Korean Chinese”.

Bodies gave birth to new bodies, words gave birth to new words.

Seeking the sounds of the world to which the two people travelled,

I crossed.

 

2016, Yuri An

국가를 상징하는 여러 표식 중 하나로 국기가 있다. 중국국기인 오성홍기는, 1949년 건국 당시 전 지역에 걸쳐 국기 디자인 공모를 통해 만들어졌다.

쩡롄쑹(曾联松)의 디자인이 최종 당선작으로 뽑혔고, 중국속담인 “별과 달을 고대한다(盼星星盼月亮)”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다섯 개의 별 들 중 가장 큰 별은 공산당 즉, 국가를 상징하며 네 개의 작은 별들은 각기 다른 층의 인민을 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의 인민들은(별) 공산당에 충성하는 애국심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질문한다. 별은 달을 고대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는 드넓은 우주 속에서 별과 달은

각기 다른 자신들만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즉, 인민은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가?

 

행성과 유사한 질량을 지니고 있으나, 어떤 항성 또는 갈색 왜성의 중력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아서

우주 공간을 독립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행성급 전체를 가리켜 떠돌이 행성(Rogue Planet)이라고 한다.

나는 떠돌이 행성이 디아스포라의 궤적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대개의 행성의 궤도에서 비켜나 있어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불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들만의 항로를 따라 항해를 지속하고 있는 별들.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불온한 별들> 작가노트, 2018, 안유리

National flags are one form of the various signs that symbolize each nation.

The Chinese flag, Wuxinghonggi, was created for a national flag design contest held throughout the country in 1949.

The design made by Zheng Liansong was selected as the final winner. Zheng says that his design was inspired by

the Chinese proverb, “looking forward to the stars and the moon.” The biggest star among the five stars in the flag

represents the Communist Party, which is the nation, while the four small stars are the people in different classes.

In other words, the stars are showing the people of China’s patriotism and loyalty to the Communist Party.

I would like to pose the following questions: Do stars have to yearn for moon?

Aren’t the stars and moon living in their own unique places, in a vast universe that we can’t even understand?

In other words, can’t the people exist without the state?

 

Anything in the planetary class which has a mass similar to that of a planet but is not restrained by the gravity of

any star or brown dwarf and moves across the universe independently is called a rogue planet.

I feel that the rogue planet resemble the trajectory of the Diaspora.

The Korean diasporas, which includes the Joseon-jok(Korean Chinese), have moved around constantly,

from citizens of Japanese colony and displaced people of a divided nation to citizens of China.

Stars that are often swaying from their planet’s orbit and continuing to sail along their own route,

even if they appear to be out of place or unstable - this might be another name for Diaspora.

Artist Statement for Rogue Stars, 2018, Yuri An

제자리에 있는 듯 보여도, 쉴새 없이 움직이는 바다는

물과 물이, 물과 다른 물체와 부딪쳐 포말(泡沫)을 일으킨다.

포말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지만 자신의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부딪쳐 떠오르는 순간 이내 곧 사라진다.

스스로 퇴적을 거부하고 또다시 태어난다.

 

여러 이유로 유랑하고, 유배되고, 추방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겐 포말(泡沫)이 빚어낸 말(言) 로 다가왔다.

자리 없음의 자리에서

혁명과 항거, 침묵과 절규의 말들을 당신에게 보낸다.

너의 세기(世紀)에서 출발한 말들이 나의 자리에서 다시 씌어진다.

바다는 여전히 움직이고 순간은 순간으로 살아가고

말(言)들은 여기 남았다. 

 

<포말(泡沫)의 말(言)> 작가노트, 2021, 안유리

Even though it looks like it is at standstill, the sea moves ceaselessly

and collides with water and other objects to form the spume.

The spume moves towards somewhere but does not take its own place.

It disappears as soon as it comes to floating, refuses to be accumulated, and is born again.

 

I felt as if the story of people who unwillingly wandered, were exiled,

and were deported are like the words of spume. 

From nowhere but everywhere,

I send you those words of revolution, resistance, and outcry.

Words that left from your century, were written again in my place.

The sea still moves, the moment lives only in an instant as its name,

and the words remained here.

 

Artist Statement for Words of Spume, 2021, Yuri An

미친년

1. 명사. 정신에 이상이 생긴 여자를 욕하여 이르는 말.

2. 명사. 말과 행동이 실없거나 도리에 벗어난 짓을 하는 여자를 욕하여 이르는 말.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다시, 사전을, 열었다.

단어들은 풍화되지 않고, 나이를 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고 내게 달려든 단어가 있다. 

오래전 한 시인이 노래했던,

상처 입고 탈락된 단어들 곁으로 떠나기 위해,

스스로 화석화되길 저항한 단어가

여기 있다.

 

미친년.

80년 5월 광주에서, 68년 프라하의 봄을 향해

스러지고 사라진 존재들을 위해 애도와 연대를 고하는

시인 고정희가 쓴 시(詩)어이다.

 

미친년.

집 밖으로, 세계의 가장자리로부터 출발해

성별, 인종, 계급, 성적지향의 차별에 대항하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친년.

하나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사전에서 누락되고, 떨구어진 말들을 움켜쥐고

노래로 몸짓으로 자신들의 역사(herstory)를 써내려가고 있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많은 여자들이,

셀 수 있는 시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폭력의 장소를 향해

‘미친년’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졌다.

 

물마루로 거슬러 올라,

다시 한번 그 단어를 길어 올린다.

시인의 언어로 새로이 빚어진

사랑과 존경을 건네는 말이다.

멀리서, 오랜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가 출발했다.

당신을 향해 오고 있다.

 

<하늘강 마믅소리> 작가노트, 2021, 안유리

Mi·chin·yeon

  1. noun. A woman who has a serious mental illness

  2. noun. A woman who is lacking in words and behaviours or doing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Reference – Standard Korean Dictionary

 

Opened, a dictionary, again.

Words weren’t weathered, still in that place, their age forgotten.

However, in the end, there is a word springing into me, undressing its name.

Here it is.

A word sung by a poet long ago,

having resisted being fossilized by itself,

to leave for wounded and erased words.

 

Michinyeon.

A poetic word composed by a poet, Goh Jung Hee,

from Gwangju in May of 1980, for the Prague Spring of 1968, 

to send condolences and solidarity for fallen and vanished beings.

 

Michinyeon.

A word spoken for women who step out of the home, departing from the edge of the world,

to oppose discrimination based on gender, race, class, and sexual orientation.

 

Michinyeon.

A word spoken for women who grab on to the words of the missing, eliminated from the dictionary,

which can’t be described in single definition, and who write their own herstory through gestures and songs. 

 

Many women,

during countable time,

were thrown away under the name of “mad woman”

towards a place of uncountable pain and violence.

 

Swimming upstream to the crest,

Once again, raise that word.

Newly invented in the language of the poet,

handing the words of love and respect.

From a distance, the voice awakened from a long sleep mounted.

Coming towards you.

 

Artist Statement for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2021, Yuri An

Review

다시, 지금:  안유리의 오래된 새로움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 Poetry Weaver  

안유리는 홈페이지에서 자신을 Visual Artist &  Poetry Weaver라 소개한다. 시각 예술가인 것은 알겠으나‘시를 직조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자못 흥미롭다. 실을 잣는 직공처럼 시를 잣는 사람, 즉 시를 뽑아 엮는 사람이라는 표현에 호기심이 당긴다. 예술을 ‘가르치는’ 대학과 기관이 즐비하지만 유독 ‘시’는 접근이 어렵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은 회화를 눈속임의 허상을 만들어내는‘기술’로 보았지만 시는 이성 외부의 존재에게 사로잡혔을때 비로소 탄생한다고 보았다. 시는 인간 개인의 의지나 주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인 뮤즈에게 매혹당했을때 일어나는 설명할수 없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예술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습득 가능한 기술이나 능력처럼 치부되지만 시는 훈련을 통해서 인위적으로가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며, 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쓰지 않으면안 되는 존재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이다. 안유리는 여러 시인의 시를 읽고 쓰고또 자신의 시를 쓴다. 앞선 시인들의 시가 촉매가 되는 일도 있고, 그 자신의 삶이 다른 시에 공명하기도 한다.  과거의 시와 현재의시, 이곳의 안유리와 과거/현재의 시인, 여기/저기의 시인이 만나 씨실과 날실이 된다는 점에서 ‘Poetry Weaver’라는 자기소개는 간결하지만 명료하다.

 

# 안유리의 전작들 

제주 방언으로 ‘끝’을 뜻하는 <깍, Writing on the Edge> 라는 제목의 문집을 냈던 안유리는 2014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이후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와 금천예술공장,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등 몇 군데의 레지던시를 거쳤고, 아트 스페이스 풀의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2015), <돌아오지 않는 강>(2016, 서교예술실험센터) 등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시아 특별전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2018),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2019,  경기도미술관-가오슝미술관 교류 주제전), <사랑을 위한 준비운동>(2021,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등에 참여했다. 이전의 전시에서 안유리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다루었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갖는 착각과 오해를 세밀하게 다루었다.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서 하멜이 출발했던 네덜란드의 테셀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에 진도를 추가하여 제작했다. 세월호와 말레이시아 항공 격추 사건 등 ‘돌아갈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다룬다.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존재들의 고통을 다 덮은 듯한 평온하고 담담한 바다를 함께 보여주었다. 한편, <불온한 별들>에서 연변이라는 지역에서 한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족’이라고 한국에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루었다. <포촘킨 스터디 시리즈>에서도 무심해 보이는 풍경과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흐른다. 서로의 처지에서 나온 미묘한 차이와 오해, 동상이몽,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관념들을 살아서 펄떡거리는 목소리로 건드린다. 우리가 함부로 믿어버린 것들, 무관심에서 그냥 지나쳤던 위선과 착각이 드러나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낯이 뜨거워졌다. 영상은 담담하지만, 우리 안의 감정이 촉발되어 불편하고 불안해졌다.

 

# 스틱스 심포니

아트스펙트럼에 발표하는 <스틱스 심포니>는 15분 길이의 2채널 영상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강을 지키는 여신인 스틱스를 소개한다. 스틱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가장 큰 강이다. 이어서 영상은 일본, 폴란드, 미국, 한국의 네 여성 시인의 시가 낭독된다.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피폭 피해자이자 반전운동가로 활동했던 시인 구리하라 사다코를 시작으로 프라하의 봄을 지나온 비스와바 쉼보르시카의 시를 소개한다. 이어 흑인에 대한 차별과 각종 억압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삶을 개척했던 마야 안젤루의 시 <나는 일어설 거야>에 이어, 마지막으로 광주의 시인 고정희의 <오매, 미친년 오네>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살다간 이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지막하게, 담담하게, 결연한 어조로, 또 강한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와 음악, 그리고 변화하는 영상이 조화롭게, 때로는 어긋난 채로 마치4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처럼 흐른다.

 

#영상과 시의 관계

네 명의 시인들의 시는 일본어, 폴란드어, 영어, 한국어라는 서로 다른 언어로 낭독된다. 세상을 떠난시인의 시는 같은 언어를 쓰는 성우의 목소리로 낭독되며, 마야 안젤루의 경우는 생전의 작가 음성 그대로 낭독된다. 고정희의 시는 마치 연극처럼 공연된다. 영상은 작가가 촬영한 여러 지역의 풍경들과 인터넷에서 수집한 과거의 기록영상들이 교차한다. 바다 혹은 강, 숲과 길의 이미지는 지역을 특정하기 힘들다. 영상을 보는 사람은 등장한 텍스트 속 시인과 영상 속의 풍경을 연결 지어 보려 하지만 영상 속 풍경과 시인은 명확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영상 속 이미지들은 텍스트의 배경이 아니고, 텍스트 역시 배경을 지칭하지 않는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글과 이미지, 그리고 음악과 산 자/죽은 자의 목소리가 교향악의 각 악기처럼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영상을 소비하는 관습에 저항하고, 음악과 영상이 있는 시를 소비하는 문화와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안유리의 <스틱스 심포니>는 새로운 유형의 영상/예술로 자리매김한다.

 

#지금, 다시, 그녀들

다시 4명의 시인으로 돌아가 본다. 구리하라 사다코는 그 자신이 피폭을 경험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위치에 대해 역설했던 반전 평화운동가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세계 2차 대전과 공산화를 겪으면서 전체를 강조하고 개별적인 고통에 무관심한 문화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존재와 삶의 중요성과 의미를 역설했던 시인이다. 마야 안젤루는 흑인에 대한 차별 속에서도 진정성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흑인과 여성 인권을 강조한 작가이다. 마지막으로 고정희는 광주와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시로 표현했다.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난 네 명의 시인은 과거에 속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 그들이 이야기한 역사 속 순간과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과거이지만 끝나지 않은 진행형인 현재이고, 현재 속에서 다시 소환되는 과거이다. 이 네 명의 목소리는 대신/함께 읽은 젊은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가 된다.

 

# 오래된, 새로운

아트스펙트럼은 2022년 한국미술을 대표하여 세계를 향해 진출할 예술가를 선정하기 위한 목표에서 진행된다. 안유리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시’라는 매체와 결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영상에서도 소위 4차 산업 운운하는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 연예인들을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젊다’거나 ‘새롭다’거나 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법한 스테레오타입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새롭다. 영상과 시를 엮어내는 표현법이 우선 새롭다. 하지만 안유리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보여주는 더 중요한 차이는 그가 속한 세대 혹은 공동체에 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시는 한국어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가 공감하고 자신을 귀속시키는 사람들 혹은 공동체가 한국이나 1980년대생과 같은 특정 시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몇 년간의 이국 생활을 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 이전의 시간에도, 이후의 시간에도 그가 계속 밖으로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존재로 자신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떠돌아다니는 시인처럼, 제주로, 남도로, 테셀로, 연변으로 돌고 돌았고, 직접 몸이 가지 못하는 순간에도 시와 글을 통해,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공감하고 연대하는 시인들과 함께 존재하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2022년 3월, 아트스펙트럼 2022, 리움미술관 도록

 

 

 

 

Again, Now: Old Novelty in the Work of Yuri An

Soojung Yi(Cur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 Poetry Weaver

Yuri An introduces herself as a “visual artist and poetry weaver” on her website. Visual artist is a familiar designation, but “poetry weaver” is unique and intriguing. The expression that one can weave poems like a weaver who spins yarn draws curiosity. There are countless universities and institutions that “teach” art, but poetry is a domain difficult to access. The ancient Greek thinker Plato saw painting as a technique that creates illusions of deceit, but he saw poetry as something one can give birth to when possessed by an existence outside of reason. Thus, in his view, poetry is outside individual human will or subjectivity, and is an inexplicable activity that transpires under the captivation of a muse, a supernatural being. Art is regarded as a skill or ability that can be acquired through education and training; but poetry exists in a realm that cannot be reached through discipline, and it is a voice that comes out of those who must write, rather than want to write. Yuri An reads many poems as well as writing her own. Sometimes the poems by preceding poets become a catalyst for her art, and sometimes she finds that her own life resonates with their poems. The “poetry weaver” is an apt description if we understand that the weft and warp the artist weaves include: poem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poet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poets from here and there, and the Yuri An of here and now.

 

# Previous Works

Yuri An began her career in 2011 by publishing a book titled Writing on the Edge (its Korean title is pronounced Kkak, the Jeju Island dialect meaning “end”). Since returning from the Netherlands in 2014, she has been leading an active career as an artist. She has been selected to participate in several artist residencies including Cheongju Art Studio, Seoul Art Space Geumcheon, and MMCA Goyang Residency. She had solo shows The Unharvested Sea at Art Space Pool (2015) and River of No Return at Seoul Art Space Seogyo(2016), and participated in group shows such as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2018), Moving & Migration (Kaohsiung Museum of Fine Arts, Taiwan &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Ansan, 2019), and As the Practice of Learning (Nam-Seoul Museum of Art, 2021). In these artworks and exhibitions, the artist explored the memories of those who have crossed the point of no return and examined the illusions and misunderstandings that people may have for one another. The Unharvested Sea refers to Hamel’s 17th-century journey from Texel of the Netherlands to Jeju Island, but also Jindo Island, the coast of which the Sewol ferry capsized in 2014. It is about the victims of the Sewol ferry disaster and the crashed Malaysian passenger flight, those who cannot return from their planned travels. The video shows a calm, peaceful ocean that seems to conceal the sufferings of those who an speak no longer. In the three-channel video Rogue Stars, the focus is on the Korean communities living in the Chinese region of Yanbian, particularly the Korean-Chinese who are categorized as “Joseonjok” in Korea. In the Potemkin Study series as well as the above works, An characteristically juxtaposed human voices with detached sceneries. In her videos, lively, fluttering voices are used to touch upon the subtle differences and misunderstandings caused by various situations of people, and their vaguely distinct goals and ideologies. They bring to our attention the hypocrisies and misconceptions that we have indifferently overlooked or carelessly believed. An’s videos appear calm, but provoke the emotions inside us, causing us to feel uncomfortable and oppression of black people; and the Gwangju native poet Goh Jung Hee’s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sang the life of the women who experienced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These women’s poems are narrated in a calm yet determined tone with a strong voice. The moving images unfold, sometimes harmoniously and sometimes out of sync, as if orchestrating a symphony composed of four movements.

 

# Relation between Poetry and Video

In Styx Symphony, the four poets’ works are read in their own four different languages: Japanese, Polish, English, and Korean. Because these poets have all passed away, An hired voice actors to read their poems, except for the case of Maya Angelou, whose poem is read with her own voice from her lifetime. Goh Jung Hee’s poem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is performed like a theatrical play. Meanwhile, the video intersects various scenes captured by the artist with found images from the Internet. It unfolds images of nondescript seas, rivers, forests and roads. The viewers may try to associate the texts with the scenes in the video, but there is no clear connection between the two. The images are not the backgrounds of the texts, and the texts do not refer to the images. As such, this is an asynchronous symphony composed of words and images that are unrelated and the voices of the living and the dead. Resisting the conventional mode of moving image consumption, and alluding to the culture of reading poetry in conjunction with music and images, Styx Symphony presents a new type of video/art.

 

# Now, Again, The Women

Now let us return to the poets. A victim of the atomic bombing, Sadako Kurihara became an anti-war peace activist who emphasized Japan's position as a perpetrator. Wislawa Szymborska was a poet who drew attention to the importance and meaning of ordinary existence and everyday life, as a critique of the post-WWII communist culture that was indifferent to individual suffering. In the face of various discriminations, Maya Angelou spoke up for the rights of women and black people through a truthful introspection of life. Goh Jung Hee Hee expressed her solidarity and sympathy for the wounded people of Gwangju. They are now all deceased, but in Styx Symphony they are summoned into our present through their voices reading their important works. The scars and traumas they spoke of remain today; they are a past that is an ongoing, unfinished present, and a past that is summoned to our present. The voices of the four women are grounded in the present through An’s work.

 

# Styx Symphony

An’s new work to be presented at Leeum’s Artspectrum is a 15-minute-long two-channel video titled Styx Symphony. The video first introduces Styx, who in Greek mythology is said to be both a goddess guarding the rivers of the Underworld, and a river that forms the boundary between Earth and the Underworld. It then narrates poems by four female poets from Japan, Poland, the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 Sadako Kurihara was a victim of the atomic bombing of Hiroshima in 1945 who also worked as an anti-war activist; Wislawa Szymborska wrote while witnessing the Prague Spring reforms; Maya Angelou’s And Still I Rise stood up against the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of black people; and the Gwangju native poet Goh Jung Hee’s Resonance From Where She Goes sang the life of the women who experienced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These women’s poems are narrated in a calm yet determined tone with a strong voice. The moving images unfold, sometimes harmoniously and sometimes out of sync, as if orchestrating a symphony composed of four movements.

 

# Expanding Empathy

In 2022, Artspectrum has resumed presenting the most promising Korean artists of the time. Here, Yuri An’s work might appear “classical” in that it employs poetry, a medium with a long history. Her video does not use sophisticated technology or eye-catching celebrities, and it is difficult to find anything “young” or “new” in it but that is what makes it appear so distinct. Her method of weaving poetry with video is unique. What’s also distinguishing about her work is that it is not specific to a certain region, culture, period, or generation. It speaks many languages and empathizes with people across time and space. That has little to do with her experience of having lived in a foreign country for several years. Long before and after that, she has always assumed herself as a being who keeps going out and around, who keeps coming and going. Like a nomadic poet, she went round and round to Jeju, Namdo, Texel, Yanbian, and elsewhere. Even when she cannot physically travel or meet in person, she connects through poetry and writing, with those who lived lives of empathy and solidarity.

Exhibition catalog, 『ARTSPECTRUM 2022』, Leeum Museum of Art, 2022

 

 

 

 

부분과 전체

안유리+허광표 <모두 말하기: 파레시아>

김뉴리 (정당 당직자)

 

 

 

부분과 부분이 모이면 관계가 생깁니다. 그리고 관계, 즉 맥락은 전체를 구성합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루는 그 관계 지형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상호작용합니다.

하지만 전체주의에서의 ‘전체’는 부분을 삼켜버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작가는 작품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부분을 삼켜버린 전체주의. 
허광표 작가의 <안막>은 전체주의에서의 ‘전체’를 다루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새빨간 천으로 색과 공간을 감각하게 하며 전시의 도입을 만듭니다. 새빨간 <안막>을 거쳐 들어가면 안유리 작가의 <파레시아: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비디오가 재생됩니다. 이 작품은 ‘부분’을 말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비디오는 기존 음악과 영화, 영상들을 자르고 이어 붙여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형식 실험으로 보는 이들에게 충격과 새로움을 던집니다. 


도입이자 전제, ‘전체’: 허광표 <안막眼膜 15, 16, 17> 
새빨간 ‘안막’이 드리웁니다. 길이와 넓이가 다른 빨간 천들이 주르륵 걸려있습니다. 성긴 천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걸려있는데도 온통 빨갛고 틈이 없어 보입니다. 중간에 드리운 천이 ‘전체’가 되어 앞뒤로 있는 ‘부분’ 천들을 모두 덮는 효과를 낸 탓입니다. 부분 천들을 걷으며 또 머리로 부딪쳐 앞으로 나아가도 한 치 앞을 알기 어려워 손을 더듬더듬해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전체 공간을 내다볼 수가 없어 답답하고 또 겁도 납니다. 하여간 ‘안막’을 걷으며 빠져나가면 사진 속 인물을 만납니다. 클로즈업된 얼굴인데,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빨간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조금 전에 공간 전체를 드리운 새빨간 천들에 들어가 있었던 경험을 하고 있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공간 전체를 드리운 빨간 천들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빨간 천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자 질문, ‘부분’: 안유리 <파레시아: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안막을 걷고 나오면 사진과 함께 재생되는 비디오를 볼 수 있습니다. <파레시아: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비디오는 영화 <라쇼몽>의 형식을 빌립니다. <라쇼몽>에서 나오는 인물 A, B, C, D는 이념을 둘러싼 각각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내뱉습니다. 어떤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 될지도 모를 말입니다. 또 진실일지도 모를 말입니다. 작가가 꺼내든 사건은 북한, 중국,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강렬합니다. 냉전 시대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이념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그렇습니다. 강렬합니다. 그래서 강렬함에 천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그 강렬함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강렬했는데, 그 강렬함을 넘어서야 하니까요. 아무리 조심스럽고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념과 관련한 문제라고 해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에 앞서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이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르게 말한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보다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전체’가 ‘부분’을 삭제하고, ‘부분’을 상실하는 전체주의의 모습입니다. <안막眼膜 15, 16, 17>이 전체주의를 감각하게 하며 작품의 전제를 제시한다면 <파레시아: 하나의 몸, 두 개의 말> 비디오는 그 전제를 바탕으로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말을 겁니다.

 

색, 공간, 형식 실험: <모두 말하기: 파레시아> 
비디오 마지막 장면에서는 빨강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자 흰 전시 공간은 빨강 프로젝션 빛으로, 그야말로 ‘시뻘겋게’ 물듭니다. 빨간 안막과 함께 새하얀 전시실은 열정의 빨강, 사회주의 이념의 상징인 빨강으로 전부 가득 찹니다. 참 이렇게도 빨갈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새빨간 천들이 주르륵 내려와 공간감을 잃게 만드는 것도 천의 배치가 아니라 색이 너무 강한 탓인 것만 같습니다. 비디오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편집’이 있습니다.
A: “공산당에 가입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B: “정신과로 가야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A와 B를 이어붙인 편집은 이렇게 충격을 줍니다. 부분과 부분은 이렇게 만나 새로운 맥락을 만듭니다. ‘공산당과 정신과?’, 어떨 땐, 이렇게 귀결이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 그 의미를 알 길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충격을 받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뭐가 어때?’ 공산당이든, 정신과든 그 말을 할 수 있고, 그 두 말이 어떤 맥락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재미있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그게 이 편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이 "그뿐이다(That's all)."인 것이 왠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 바깥에서, 부분과 전체

‘부분과 전체’라는 키워드는 작품 내부만이 아니라 작품과 작품 바깥 관계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안유리와 허광표 작가가 미술계 바깥에 있는, 한 정당의 당직자인 제게 평론을 제안한 것도 작가의 열린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안유리 작가의 행보를 보면 그는 미술 작업을 ‘부분’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정치사회를 전체로 보고, 그 둘의 상호작용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안 작가는 자신의 활동을 “예술가로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문화적, 정치적 이슈에 공감하고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안유리 작가가 하는 작업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 만들기, 관계 발견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자 박상훈의 『정당의 발견』에서 좋아하는 내용이 전시를 보고 나오자마자 떠올린 ‘부분과 전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참 재미있었습니다. “민주주의란 ‘부분(들)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집단적 갈등과 차이, 열정들이 몇 개의 ‘부분’part으로 조직될 수 있어야 하고, (중략) 그 ‘부분’들을 가리켜 정당party이라고 하며, 그런 복수의 정당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한다.” 
<모두 말하기: 파레시아>는 ‘부분을 삼켜버린 전체주의’를 문제 삼는 미술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분이 없는 ‘전체’는 전체주의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부분을 이루는 말‘들’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세상에 등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안유리, 허광표 작가의 작품 제목이 바로 ‘모두 말하기’입니다. 말할 수 없게 하는 조건 속에서 ‘말하기’를 다루는 두 작가의 작품은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과 연결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레시아’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해야 했던 고대 그리스와 꼭 같지는 않지만 이념 문제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안유리, 허광표 작가는 그러한 현실 인식 속에서 서로 다른 작품, 색과 공간을 이용하고 형식 실험을 하는 비디오 작품으로 하나의 전시를 완성해냅니다.

 

2020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전시 공모 선정전 《절묘한 균형》 도록 

 

 

 

 

안유리가 우리에게 드리운 북방의 그림자

조지은(작가, 믹스라이스)

한참을 경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하려고 했던 ‘근대 이주’ 관련 작업을 위해 요즘 나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 글을 쓸 때 즈음 나는 태평양 어느 섬에 다다랐다. 오히려 이곳은 경계가 없는 곳,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들이 스쳐 지나갔던 장소이다. 잘못 왔거나, 원하지 않았던 전쟁 때문에, 혹은 특별한 목적 때문에 거쳐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섬은 지나간 괴로운 역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일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의 경계를 쳐다보고, 혹은 더듬어 본다. 오래전에 이 섬에 왔던 어떤 사람부터 일본을 거쳐 저기 먼 자바섬에 닿은 어떤 이들까지. 이들의 이주는 모두 ‘전쟁’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에 떠밀려 ‘여러 곳’을 당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그들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그 흔적들은 오랜 시간 탓에 늘 간접적인 흔적들이다. 그저 흔적을 쳐다보고, 기록하고, 상상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들의 경계들에 이토록 관심을 갖는 것일까? 나는 어떤 지점에서 서서 과거의 그들과 어떤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내게 했던 그 질문들의 방향을 돌려 안유리에게 질문을 해볼까 한다.

 

믹스라이스로 활동하면서 우연히 내가 만났던 타지는 남쪽이었다. 아마도 초기에 내가 접했던 이주민들이 대부분 동남아시아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방에서 온 타인들, 남방으로부터 그들을 타고 온 물질들, 향기들… 그래서 한국이란 동아시아 변두리에서 남방이란 어떻게 접하게 되었을까 질문한다면 비약해서 ‘이주 노동’을 통해 열대를 만난 것이 아닐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믹스라이스 비디오교실을 참여했던 조선족 이주민도 있었고, 마석에서 축구를 함께 했던 중국인, 축제에서 만난 키르기스스탄, 몽골 이주민 등 여러 북방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별 이유 없이 그들과 만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나에게 자극을 주었던 남방의 사람들과의 인연은 더욱더 나를 남방으로 향하게 했고, 그러다 보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태평양 어디 즘에 있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안유리를 만날 때마다 북방에 대한 질문을 하곤 했다. 안유리에게 가끔 듣는 북방의 구체적 이야기들은 남방에 익숙한 내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안유리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그 북방의 흔적들을 <포촘킨 스터디 1. 서울 : 침묵의 탑, 불의 집>, <포촘킨 스터디 2. 베를린에서 도문까지 : 물뿌리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포촘킨 스터디 1>에서 등장하는 분주한 대림동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가리봉동, 부천의 원미동, 혹은 성남의 모란동, 안산의 원곡동 또 어느 지방의 어느 곳과 유사한 풍경이다. 어쩌면 지금 <포촘킨 스터디 1>의 ‘대림동’이 수도권 작은 시마다 하나씩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빨간 간판들과 익숙하지만, 완벽히 읽을 수 없는 한자와 구하고 또 구해야 하는 방들에 대한 정보들, 어색한 음식의 향기들은 작은 도시의 한구석을 채우고 이내 사라진다. <포촘킨 스터디 1>을 보면서 나는 대림동의 어색함과 동시에 종묘의 어색함도 느껴야 했는데, 우리에게 가깝지만 와 닿지 않는 뿌리와 뿌리를 찾아 멀리서 온 동포라는 이름의 타자를 동시에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치, 부적합에서 안유리는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북방의 그림자를 도시 한 구석에 잠깐씩 드리운다.

 

다른 한편에서 안유리는 이념의 경계들을 드러낸 <포촘킨 스터디 2. 베를린에서 도문까지 : 물뿌리로 가는 길>에서 동독과 도문은 유독 썰렁하고 차가워 보인다. 사실 그것은 실제이다. 내가 오래전 방문했던 동독의 한 도시, 가끔 방문하는 북쪽에 가까운 남한의 지역들, 그 풍경들은 군더더기 없이 파랗게 차가웠다. 이념이 낳은 풍경인지, 혹은 우리의 관념이 낳은 풍경인지를 모르겠으나 그런 경계의 느낌은 나로서는 유사했다.이 작품에는 도문과 북한과의 경계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내가 안유리에게 전해들은 구체적 이야기들은 담겨있지 않는데, 이를테면 도문 사람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콩 한 가마니, 쌀 한 가마니를 이고 때때로 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나 혹은 북한사람들이 종종 이 다리를 건너 넘어오면 가까운 이들이 집에 숨겨주었다는 이야기 등등이 그것이다. 경계를 두고 서로를 보살피기 위해 했던 이 행위들은 아직은 숨겨져야 하거나 이념의 경계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로 형성되지 않는다. 서로가 느끼는 ‘긴장’은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한다. 도문과 북한의 경계, 탈북과 남한의 경계, 남한과 북방의 경계가 우리에게 ‘이야기’가 되려면 그 틈이 더 벌여져 다양한 개입과 말들이 오갈 때 가능할 것이다. 경계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내가 훌쩍 뛰어넘은 상태에서 그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라면 안유리는 분명한 경계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며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안유리의 <포촘킨 스터디 2>는 남한 외부에 위치한 두 도시의 표면을 매만지는 것일 수 있다. 안유리는 이 표면을 통해 유사성으로 남북의 경계를 바깥쪽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도문의 경계를 통해 북한의 풍경을 거울로 비추어낸다. 다시 말해 <포촘킨 스터디 1. 서울 : 침묵의 탑, 불의 집>이 남한의 안쪽으로 북방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면 <포촘킨 스터디 2. 베를린에서 도문까지 : 물뿌리로 가는 길>은 남한의 바깥쪽으로 북한의 풍경을 거울로 비추어 낸다.

몇 년 전 <r:ead-레지던시 동아시아 다이알로그> 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작가와 기획자들이 모여 토크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각 국가마다 작가 한 명과 큐레이터 한 명, 한일 통역가, 중한 통역가(한국의 경우) 4명이 페어가 되어 주제와 작업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이 레지던시의 특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통역자들, 이를테면 예술 번역자들이 대부분 예술계에 있는 연변의 조선족, 재일 조선인 같은 ‘경계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동아시아의 경계와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겪은 근대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오히려 동아시아 서로의 상황들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는데, 번역의 오류도 오히려 그 경험을 뾰족하게 드러나게 했다. (이 만남에는 모국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 레지던시의 일종의 특이한 룰이었다.) 이 대화 가운데 참여자 안에서도 동아시아가 겪는 이념적, 역사적 갈등들이 여전히 드러났다. 중국 국적의 한국계 번역자, 대만인으로서 일본어로 글을 쓰는 소설가, 재일조선인으로 북한을 촬영하는 작가 등 우리가 처한 여러 경계들을 한편으로 공감하고, 한편으론 갈등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작가 안유리가 경험하는 일상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신경질적으로 영상을 파고들고, 서울의 풍경이 되감아 지는 동안 대림동의 월세 방과 뿌리의 종묘, 도문의 풍경은 어떻게 접합되어 우리 앞에 놓여 졌는가 다시 생각해 본다. 이 경계들의 부적합과 불일치는 우리에게 안유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거친 경계의 표면들을 나는 안유리가 좀 더 오래 매만졌으면 좋겠다. 홍콩의 상황에 공감하고 연변에 있는 가족의 이념에 대해 갈등하며 일상의 경계에서 안유리가 북방의 그림자를  좀 더 불러오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안유리가 보여주는 ‘포촘킨 파사드’의 표면들이 언젠가 그 표면에 구멍을 내어 경계의 ‘이야기’를 뿜어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2019년 10월, 금천예술공장 비평문

 

 

 

 

시도 이름도 없는 용액 : 안유리의 <불온한 별들>

안소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안유리가 <불온한 별들>을 포함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일련의 영상들(<월강>, <몸>, <말>, <소리>)을 선보였을 때, 그것들은 어딘가 어긋났고 낯설고 불편했다.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불온한 별들>을 보고 난 후 나는 안유리에게 그 낯설음과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정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느낀 어긋남이 일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늦게 그 불편함의 이유를 밝혀보기로 했다.

시적이지 않게

 

첫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1]에서 안유리는 시를 지었고, 타인의 시를 불러냈고, 시인과 대화했다. 수사는 거의 없었지만 그의 문장들은 함축을 아끼지 않았고, 리듬을 띄워올렸으며, 영상 속 목소리는 “읊조리다”라는 동사와 가장 잘 호응했다.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안유리의 새 작업을 보러 들어갈 때, 나는 이미 그런 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몽타주 문법과는 거리가 먼 영상에서는 조선족의 낯선 억양과 툭툭 끊기는 말소리, 아름답지 않게 친숙한 연변의 풍경, 여운을 허용할 틈 없이 이어지는 음악들, 바특하게 연결된 뉴스 소리 등이 숨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안유리의 시적 풍경을 기대했던 나는 집을 잘못 찾아들어간 사람처럼 당황하며 밖으로 나왔다. 

 

지금에서야 묻는다. 나는 왜 당황했을까? 그의 영상이 더 이상 시적이지 않아서일까? 그러나 “시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얼마나 제한적 의미로 이해되는지 깨닫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안유리를 통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시적”이라고 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그것은 통속적인 의미에서 “시적인”은 흔히 “시의 정취를 가진”보다 훨씬 좁은 의미로, 즉 ‘낭만적인’ 혹은 ‘서정적인’ 같은 의미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영은 그의 시어는 “시어의 세속정 정의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시어”라고 했다.[2] 어쩌면 나는 그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유리의 시를 통속적 의미의 ‘시적’인 것으로 환원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안유리의 작업은 언제나 낮게 깔린 느릿한 목소리, 긴 여백, 페이드 아웃 따위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불온한 별들>은 분명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시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유리에게 시는 무엇인가? 그는 서경식의 『시의 힘』을 예로 들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3] 그래서 나는 고쳐 묻기로 했다. 안유리는 어디(로)를 걷고 있는가?

 

서둘러 이름하지 못하게

 

안유리는 불편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불편함을 서경식의 표현을 빌려와 다시 써보면 “가도록 되어 있는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안유리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국가와 민족이 어떤 의미인지 묻고 그들이 내놓는(혹은 차마 내놓지 못하는) 대답을 영상에 담으려 했다. 이 영상은 남한의 사람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 앞에 서둘러 세우는 이미지와는 뭔가 달랐다. 흔히 사람들이 조선족의 정서라고 상상하곤 하는 서러움, 그리움, 향수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남아있을 법한 민족적 흔적도 찾지 않았다. 안유리는 빠르고, 갑작스럽고, 소란스럽고, 때로는 거친 영상을 통해 그들을 향한 관성적 시선에 제동을 걸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이 영상 앞에서 어떤 규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영상은 흐르던대로만 흐르던 물길을 가로막고 함부로 이름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덜 알려진 사실들을 확인하게 한 뒤, 특정 정서를 향해 몰아감으로써 대상에 대한 관심을 붙잡아두려 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의 형식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물어야겠다. 안유리가 막아놓은 물길들 사이에 멈춰선 관객은 어떤 힘을 감지하는가? 판단을 멈추게 하는 정지의 힘 외에 어떤 변화의 힘을 감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당황에 의한 경직 말고 어떤 방향전환의 동력을 갖는가? 

 

둘 사이에 있지 않게

 

<불온한 별들>은 중국 국기(오성홍기)의 별이 인민을 가리키며 큰 별 혹은 달은 국가를 가리킨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상징은 조선족에게는 자명하지 않은데, 안유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족은 국가와 민족에 대해 특정한 정체성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안유리는 그들을 궤도를 벗어 났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떠돌이 별, 불온한 별이라고 부르며, 영상의 제목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안유리의 첫 번째 개인전부터 나타난 일관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항(二項)’의 구도와 그 사이의 움직임이다.[4] 안유리는 이곳과 저곳, 국가와 민족, 한국과 중국, 고향과 타향 등 이원적 구도 내에서 조선족들이 어떤 관점을 갖는지 알고 싶어 했고, 실제로 인터뷰이들의 대답은 이 단단하고 커다란 용어들에 붙들려 있다. 결국 안유리가 이야기하려 하는 디아스포라의 경계성이나 부유하는 정체성 등은 이런 이항구도 사이 또는 경계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꼭 이렇게 크고 단단하고 이미 익숙한 항(項)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 용어 자체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주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을 언급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으며 안유리가 주목하는 것도 그런 개념들을 넘나드는 디아스포라의 유동성이다. 하지만 이항대립을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문제를 쉽게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설정하는 순간 모든 움직임은 두 고체 사이에서, 이미 익숙하고 단단한 항 사이의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를 액체의 감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가? 조선족을 어느 쪽 고체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액체 같은 유동성을 본성으로 하는 존재일 수는 없는가? ‘조선족’은 국민국가 수립 이전의 국가명에 민족을 뜻하는 접미사를 붙인 이름이다. 이 이름은 물론 최초의 대량이주가 일어났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지만, 묘하게도 그 이름 자체로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이라는, 한국에서는 국민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조선족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국가와 민족 그 어느 쪽에도 절대적으로 동일시 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단단한 것에도 기댄 적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영상의 낯선 형식이 왜 낯선 내용이 아닌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익숙한 문제를 담아야 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유튜브의 거칠게 편집된 영상이 더없이 흔해진 오늘 내가 안유리의 영상에 당황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 형식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과 형식 사이의 거리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쩌면 국가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국민국가, 민족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들의 세포 깊숙히 각인된 타자의 감각일 지도 모른다. 타자에 대한 안유리의 온기 어린 지향을 생각할 때 그가 언어적 차원보다 더 작은 화두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게 된다. 그것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은 세계일 뿐만 아니라 이쪽과 저쪽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세계일수도 있다. <불온한 별들>은 한마디로 마치 과포화 용액과 같다. 그 안에는 디아스포라에 관한 수많은 의문, 정서, 사실들이 밀도 높게 뒤섞여 있어서 여전히 고갈되지 않은 문제제기를 기대하게 된다. 다만 아직은 그 안에서 구체적인 문제가 응결될만한 결정핵을 붙잡지 못했다. 아마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안유리가 자신의 온기를 잠시 내려놓고 그 용액을 차게 식혔을 때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형태의 결정이 맺힐 것이라 믿는다.   

 

[1] 안유리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 2015, 아트 스페이스 풀.

[2] 정은영, 「마침내 시(詩)가 된 말들」, 안유리 개인전 도록 『추수할 수 없는 바다』, 2015, 98쪽.

[3] 같은 곳.

[4] 안소현,「시(詩)가 필요했던 이유, 안유리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 부쳐」 안유리 개인전 도록 『추수할 수 없는 바다』, 2015, 92쪽.

2019년 1월, 청주시립미술관 기획전 <아직 살아 있다> 도록

 

 

 

 

Solution without poem nor name: <Rogue Stars> by Yuri An

Sohyun Ahn (Director of Art Space Pool)

When Yuri An presented her series of videos under the theme of Korean diaspora including <Rogue Stars>(<Cross a River>, <Body>, <Words>, and <Sound>), they were somehow incongruent, unfamiliar and inconvenient for me. Unable to explain the reason, I just observe them. After I viewed <Rogue Stars>, I talked to Yuri An about this unfamiliar and inconvenient sensation. The artist told that she actually did want to make viewers inconvenient. I came to think that the incongruence I have felt could be a congruence. That is why I decided to explain belatedly the reason.

 

Unpoetically

 

In her first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1], Yuri An wrote a poem, cited others’ poems, and conversed with the poet. Without any rhetoric, her sentences were wealthy of ellipsis, set rhythms afloat, and the voice in the video matched maximally to the verb “recite”. Maybe due to the resonance of this memory, I was already expecting such kind of poem when I came to see her new work. But on the screen far from a traditional montage grammar, hecticly passing were a strange intonation and discontinuous words of Joseon-jok (ethnic Koreans living in China), unbeautifully familiar landscape of Yanbian, music continuously filling up any audio break, and breathless streaming sounds of news. Having expected the poetic landscape of Yuri An, I got out of the space all disconcertedly as if I ran into a wrong address.

 

I ask just now: why was I so perplexed? Because her video work was not poetic any more? But it was no other than Yuri An who let me realize how limited our definition of the adjective ‘poetic’ is. The artist doesn’t want her works to be described ‘poetic’, because the common usage of the word ‘poetic’ is much narrower than ‘possessing the qualities of poems’, reduced to meanings such as ‘romantic’ or ‘lyrical’. The critic Jung Eun Young described the poetic language of Yuri An as “Poetic language wishing to drift apart from its common definition”. [2] Even though I have read this text, I might have reverted the poem of Yuri An to the common definition of ‘poetic’. I might, therefore, have had prejudice that her works are supposed to include always low and slow voice-over, long break, and fade-out, etc. <Rogue Stars> are certainly not lyrical nor romantic. But we cannot affirm that it is not a poem. If so, what is a poem to Yuri An? She quoted 『The Power of Poetry』 of Seo Kyung Sik. “Not walking because I know where the path leads, but walking even though the path might lead to nowhere.” [3] So I decided to reformulate my question: around(to) where is Yuri An walking?    

 

Not to be able to name hastily

 

Yuri An said she wanted to make the viewers inconvenient. In other words borrowed from the expression of Seo Kyung Sik, the inconvenient is “Not allowing to take the path that is supposed to be taken”. The artist asked the people called Joseon-jok what nation and ethnicity mean to them, in order to film the answers they give (or can hardly give). This video showed the images different from the impression hastily attributed to the name of ‘Joseon-jok’. It doesn’t allow any sorrow, longing or homesickness that we would imagine to be typical emotions of Joseon-jok, and doesn’t try to search for any ethnic traces that might remain in them. Yuri An seems to feel like putting a brake on the conventional look on Joseon-jok, through this fast, abrupt, loud and sometimes rough video. Indeed, I could not make any definition in front of this video. Her video blocked the usual waterway and prevented the reckless naming. It was quite different from the ordinary documentary which intends to show the viewers some unknown facts, then drives them to a specific emotion to hold their interest in the subject. But I must ask once again. What force do the viewers sense, when they stop between the waterways blocked by Yuri An? Besides the power of brake that makes any judgment suspended, what force of change can the viewers detect? What kind of driving force to change the direction does this video possess, other than the stiffness caused by the embarrassment?  

 

Not to be in between the two

 

<Rogue Stars> starts from the fact that the stars on the Chinese national flag (Five-Starred Red Flag) symbolize the people, the big star or the moon the nation. Such symbol is not clear though to Joseon-jok. According to the expression of Yuri An, Joseon-jok are people who keep putting on and taking off a specific identity vis-à-vis nation and ethnicity. Therefore the artist called them wandering stars that are off the orbit but keep going on their way, namely rogue stars, from which the title of the video came. On the other hand, we can find in this video one consistent characteristic of Yuri An since her first solo exhibition, which is the structure of ‘binomial’ and the movement in between. [4] The artist wanted to know what perspective Joseon-jok have in the binomial structure such as here and there, nation and ethnicity, Korea and China, homeland and foreign land. The answers of the interviewees are actually bound by these solid and overwhelming terms. Eventually, the liminality of diaspora or the floating identity pursued by the artist ends up being concluded as a question about the in-between or the border of such binomial structure.

 

But does the issue of diaspora have to be started from such big, solid and predefined terms? It is rather natural to mention nation and ethnicity since the term itself indicates the migration crossing over the borders of countries, and the artist also focuses on the fluidity of diaspora crossing over such concepts. But just setting up the starting point on the binominal opposition tends to lead us to an easy reduction of the question, because as soon as it becomes the starting point, all movements are explained as something happening between two solid matters, predefined and rigid terms. However, can’t we explain the diaspora with a sensation of liquid? Is it impossible that Joseon-jok are the beings with a fluidity as liquid by nature, instead of being those who cannot fully belong to any solid? ‘Joseon-jok’ is a naming made by attaching a suffix ‘jok’ meaning the ‘ethnicity’ to ‘Joseon’, the name of the ancient nation before the Korean government has been founded.  This wording came from the name of the period when the first massive migration happened. But curiously enough, the appellation itself insinuates that they are minority in China and non-citizen in Korea. Joseon-jok might not have made their own decision to exist without any absolute identification to any nation or ethnicity, but they might be those who have never been actually dependant on any solid entity. From this, I get curious about why this unfamiliar form of the video had to deal with the familiar issue of the identity of nation and ethnicity, instead of a more unfamiliar issue. In this era of flooding roughly-edited videos on YouTube, wouldn’t it be because of this gap between the content and the form, not the form itself, that I was disconcerted by the video of Yuri An?

 

So we may have to pay more attention to the sensation of being a stranger remaining deep in their cells, rather than the national or ethnic identity which is an exclusive property of a national or ethnic state. When I think of Yuri An’s warm attention toward strangers, I wish the artist will also be interested in a smaller theme than the linguistic one. Not only they live in a world that doesn’t belong to any side, but also they might not even consider that there exist this and that sides. <Rogue Stars> is, in a word, like a supersaturated solution. Numerous questions, emotions, and facts about diaspora are so densely mingled there that it makes us expect the rest of the questions also brought up. There is, however, no crystal nucleus for the condensation of any specific question yet. I believe, some time very soon, when Yuri An cools down her warmth and chills that solution, the questions will be crystalized in a form we have never seen before.

 

[1] Yuri An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2015, Art Space Pool

[2] siren eun young jung, 「Words that finally became a poem」, Catalog for Yuri An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2015, p.98

[3] Id.

[4] Sohyun Ahn, 「The reason why the artist needed poetry – Commentary on Yuri An’s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Catalog for Yuri An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2015, p.92

Translated by Cho Hye Kyong

Exhibition catalog, 『Still Alive』, Cheongju Museum of Art, 2019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박주원 (미술사)

 

지난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된 전시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How little you know about me)》는 ‘아시아’라는 키워드를 출발점으로 경계의 불분명함, 정의를 내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 마치 잘 알고 있는 듯 착각하지만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들에 대한 탐구로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의문들을 안에서 전시는 국가, 국경, 민족, 정체성과 같은 전통적 개념들을 소환하고, 이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형태로 긴장감을 고조하며 개인들을 고립시키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과거로부터 시작된 이 ‘보이지 않는 힘은’ 은 소리 없이 돌고 돌아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규제하고, 승자와 패자의 역사를 그려낸다.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안유리 작가의 <불온한 별들>(2018)은 19세기 말, 한반도를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조선인들의 이주 역사 속에서 여전히 우리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로 ‘하나로 정의될 수 없음’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이 영상작업에서 작가는 ‘조선족’의 이야기를 통해 비단 민족성,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문 제기를 넘어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방식에 대하여 제안하였다. 3개의 채널로 구성된 이 영상 작업 속에서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은 조선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위치하면서도 이를 바라보는 각기 전혀 다른 관점들을 분절된 인터뷰의 형태로 드러낸다. 한때는 (어쩌면 아직도) 스스로를 ‘단일 민족 국가’로 지칭하는 대한민국에서 민족과 국가를 구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생경한 것인가? 를 지적하며, 인터뷰 속 어떤 이는 중국이라는 대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반면 다른 어떤 이는 대한민국 국민과 조선족은 결국 하나의 민족이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한다. 또 다른 이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 아래 본인을 중국인(한족)으로 인식하고자 하였지만, 주변인들로 인해 조선족으로 구분 지어졌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터뷰들을 통해 <불온한 별들>(2018)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조선족의 자리(status)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국 영토를 거점으로 중국인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의 생활방식은 분명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고, 그들의 언어인 조선어 역시 한국어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어도 한국어도 아닌 모습으로 변형되는 상황 속에서 한 작가는 조선어로 쓰인 본인의 글이 한국어로써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어떻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상황에 관해서(대해서) 이야기 한다.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족은 누구인가? 또는 조선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단순하고도 무심한 질문을 넘어 국가, 민족이라는 개념 안에서 누군가를 하나로 정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결국은 이 국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마저 들게 만든다. 경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경계를 흐리는 존재들, 그로 인해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이 흥미로운 상황에 대하여 <불온한 별들>(2018)은 나레이션을 통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조국(祖國)을 모른다. 내게는 정계비(定界碑) 세운 영토(領土)란 것이 없다. 그것을 소원하지 않는다. 나의 조국(祖國)은 내가 태어난 시간(時間)이고 나의 영토(領土)는 나의 쌍두마차(雙頭馬車)가 굴러갈 구원(久遠)한 시간(時間)이다”.[1] 바로 개인의 이야기이다. 국가와 개인, 민족과 개인은 마치 반대 개념처럼 종종 대척점을 이루기도 하지만 이러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곧 개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문제가 가장 사회적인 문제에 가까이 맞닿아 있듯,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는 기존의 전통과 관념들, 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흐려진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결국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가까운 접근법을 택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위치를 밝힘에서도 개개인이 각자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같이 우리 주변의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의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안에서도 각기 다른, 또는 대안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대상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로 지금 어디에서든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1] 이용악, “쌍두마차”, 분수령, 1937

2018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집

2019년 7월, K-NOTe, 토탈미술관 프레스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Joowon Park (Curator of 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Seoul) held the exhibition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in the first half of 2018. Taking the keyword 'Asia' as a starting point, the exhibition extended its inquiry into the difficulty of defining boundaries, the state of constant fluid change, and the things we think we know, but in fact know very little about. With these questions, the exhibition recalled traditional concepts of nation, boundaries, ethnicity, and identity, and asked how these invisible forces raise anxiety and isolate individuals. Since long ago, this ‘invisible power’ has swirled around and around without a sound, controlling our lives and determining history’s winners and losers. Artist Yuri An video work <Rogue Stars> (2018), made especially for this exhibition, is a story about Joseon-jok (ethnic Koreans in China), who along with other Korean emigrants dispersed from the Korean peninsula to other parts of the world in the late 19th century, but who continue to speak and write in the very same Korean language. She focuses on ‘not being defined as one’.

Yuri An suggests that beyond questions of ethnicity and national identity, the concept of ‘Joseon-jok’ offers us various different ways of looking at the issues we face and our world. In this three-channel video, although the many interview subjects identify themselves under the label of ‘Joseon-jok’, they nevertheless have completely different views on the issue.  One interviewee points out how strange it is for Koreans, who (somehow still) consider Korea to be an ethnically homogenous nation, to differentiate between nationality and ethnicity. At the same time, he says, he is proud of his own identity as Joseon-jok, one of the 56 minorities of China. Another interviewee declares that Koreans and Joseon-jok are the same people in the end. Someone else considers himself Han Chinese under the concept of ‘One China’, but talks about how others identify him as Joseon-jok. Through these stories, <Rogue Stars> (2018) exposes the shifting status of Joseon-jok, that constantly changes depending on the environment and circumstances. Even though Joseon-jok live in the Chinese territory as Chinese people, their lifestyle and language is clearly inherited from Korea. As time goes by, their language has transformed into something that is neither Chinese nor Korean, to the extent that one writer talks about her worries about how her words can be accurately expressed when they are translated from the Joseon language into the Korean one.

 

The video goes beyond simple and careless questions such as who are Joseon-jok and what is their identity; it raises the questions of whether it possible to define a body as one through the concepts of a nation and ethnicity, and subsequently whether those conceptions are ultimately necessary at all. Through its narration, <Rogue Stars> (2018) comments on this fascinating situation whereby boundaries are erected and blurred, and as a result rendered entirely meaningless: “I do not know my homeland. I don’t have a territory where I have erected a national monument. I do not wish it. My homeland is the time in which I was born. My territory is the eternal time in which my two-horse carriage marches.” [1] This is the story of the individual. Although at times the state and the individual or ethnicity and the individual seem diametrically opposed, this world is made up by the stories of individuals. Just as the most personal of issues are close to the most social of issues, if we concentrate on individual voices that have been blurred by the invisible power of the traditional customs and concepts that restrain our thoughts, might it not be possible to select a proper approach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a subject? Just as individuals, under the same label of Joseon-jok, bear their own respective viewpoints, we may in observing our surroundings and making an effort to understand one subject, come to recognize the existence of different, alternative perspectives and come closer to the essence of the subject. That is why it is necessary to acknowledge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1] Lee Yong Ak, “Two-Horse Carriage”, Watershed, 1937

 

MMCA Residency Annual Report 2018

K-NOTe No.62, Total Museum Press, July, 2019

The milieu of poetry: Yuri An’s ‘The Unharvested Sea’ and ‘Sailing Words’

Adeena Mey (University of Lausanne)

For the past couple of years South Korean artist Yuri An has been producing a compelling body of work which closely relates poetry, moving (and to a lesser extent still) images, and a series of self-published books which feature her writing. In 2015 she was a recipient of the Seoul Museum of Art award for Emerging Artists (the latter label only making her work even more remarkable for the consistency of its formal efforts and of its literary ruminations), a program which supports early career artists in South Korea with the organisation of a solo exhibition, a workshop, and a matching session with critics and curators to nurture discussion around the work.

Yuri An’s show took place at Pool, a non-profit space run by artists, curators, and theorists. Pool is located in the neighbourhood of Gugi-dong, which slightly sets it apart from nearby Tongui-dong, home to some of Seoul’s most noted alternative contemporary art spaces including Gallery Factory, Audio Visual Pavilion, and The Book Society. Positioning itself as the inheritor of the region’s historical avant-garde ethos and aiming at articulating a critique of the ‘art system, a revisionist analysis of history’ and the production of ‘counter publics’,[1]it is fair to say that its relative off-centeredness materialises this aesthetic, discursive, and institutional agenda, although ventures such as underground galleries always function as a kind of urban pharmakon, offering temporary cures for a poisonous process of gentrification they themselves feed. This process is particularly impressive in Seoul, which Franco Berardi has called the ‘perfectly recombinant city’.[2]

 

Most commentators have emphasised the use of language, of the written word and poetry, in Yuri An’s artistic practice, often drawing the conclusion that she is essentially a writer and a poet. In her catalogue essay Pool curator Jaeeun Jung describes Yuri An’s exhibition both as an ‘epic poem embracing a long journey’ and ‘a lyrical poem embodying the longing and sympathy of this journey’s every moment’.[3] Taking Jung’s remark in its most primary sense one might then want to interrogate (following debates regarding the exhibition as medium or meta-artwork) whether we can locate poetry not only within the continuum created by the artist’s protean production made of projected images (digital film, slides) and writing (poetry books and installations) but also as part of these relationships as a whole which constitute the exhibition.

 

Entering the main gallery at Pool one first encounters two films by Yuri An: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From Texel to Jeju (2015) and The Unharvested Sea (2015), the former also being the title of a slide projection made in 2014 and exhibited in the adjacent room. This process of rematerialisation and remediation through which a work, its material and semiotic components, (re)constitutes itself across media traverses Yuri An’s oeuvre.[4] For instance this is also the case of the fourth piece shown in the The Unharvested Sea, titled Sailing Words: A Dialogue with the poet Huh Sukyung (2015), a text installation made of hanging panels reproducing the artist’s correspondence with poet and archaeologist Huh Sukyung about the nature of writing in its relationship to the experience of exile. As part of a subsequent eponymous solo show Sailing Words was remade as a three-channel video installation, the text superimposed over sequences of quiet wavelets shot at night.[5] Yuri An seems less interested in a form of modernist critique or reflexive stance vis-à-vis the filmic apparatus and writing on the other (such as in the diverse strands of ‘cinepoetry’) than in creating a milieu[6] in which writing accommodates itself within a diversity of media apparatuses.

 

The transmedia environments created by Yuri An unfold as interfaces where her narratives are written, which develop in a process weaving autobiographical elements, fiction, and historical investigation, haunted by the two interrelated issues of linguistic and geographical displacement and of the origin of language.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From Texel to Jejuis composed of alternating sequences of blank black screens with an English voice-over and Korean subtitles,[7] also including coloured scenes of an empty beach and black and white images shot at sea. The film intertwines two actual journeys (of Yuri An herself and of the 17th century Dutch mariner Hendrick Hamel) into a meditation on language and the absence of a mother tongue, the quest for its origin being projected onto her own personal history. Displacement results in such a search in which the hiccup – believed to have resulted from the human amphibian past and the need to adapt to new milieus – echoes Yuri An’s breathing techniques for the acquisition of language which she inherited from her grandmother:

 

I was raised by her words

Her words

Gathered from where water meets land

Slowly, travelled from her mouth to my mouth

 

This belief in the transmission of words was shared by the French poet Edmond Jabès, which he considered to be the ‘mission of the writer’: ‘she interrogates the words which interrogates her, she accompanies the words which accompany her’.[8] In Yuri An’s films words become quasi-physical entities, part of a nexus where the boundaries between signifying language and the sonic realm are questioned through her use of speech and sound, enmeshed and circulating between feminine entities (her grandmother, the sea, the land, the moon). The beach and sea sequences never quite represent deep waters but rather the liminal space and the threshold between shifting sands and shallow waters. Also, through this amphibious phenomenology unfolds a complex network of references.

 

Mouth to Mouth (1975) is the title of a video by the American-Korean artist Theresa Hak Kyung Cha; it addresses Korean language and its loss through a basic physiological action (the video consists of close-ups on the artist’s mouth closing and opening, forming an ‘O’) in her exploration of exile. Yuri An’s own experience as a migrant living in Holland reverberates with Hamel’s history recounted in his An Account of the Shipwreck of a Dutch Vessel on the Coast of the Isle of Quelpaert Together with the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Corea. His journey with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from Texel to Jeju (which left him stranded in Korea from 1653-1666) is the exact reverse of the artist’s, who started the project after a visit to the Dutch island.

In her cogent analysis of the intertwinements of cinema and language loss and of linguistic disturbances as a vexed ontological factor in filmic thought, Tijana Mamula cites novelist Hector Bianciotti, for whom ‘geography […] is only the apparent, purely superficial, form of exile’. Mamula continues, stating that ‘language, and its inevitable disturbances, is instead its deepest and most intimate’.[9] In Yuri An’s work both geography and language are profoundly entwined. As if consciously willing to work outside of any totalising nationalistic spheres (in this case South Korea and the Netherlands) from which language’s sovereignty equates that of the state, her experience of geographic and linguistic deracination is of a differential nature, taking place between two islands. Jeju and Texel function as allegories for the possibility of poetry. To the same extent one could contend that while being transnational her geopoetics of islands and alienation is inscribed outside of the realm of the discourse of ‘global art’ and its recoding of multiplicity into undifferentiated singularities and the telos of art history. Yuri An’s art remains fundamentally exploratory and open to contingency.

 

In The Unharvested Sea (2015), the second film on view at Pool and a sequel to Floating Land Drifting Heart, a new place (Jindo) is added to the journey between Texel and Jeju. The work extends the artist’s quest for the place of birth of poetry and intersperses it with actual tragic events she encountered, most notably the sinking of the Sewol Ferry in 2014, when more than 300 teenagers lost their lives drowning off South Korea’s southwest coast. The event provoked public outcry and criticism towards president Geun-hye Park and her government’s mismanagement, pointing to deeper dysfunctions in Korean politics. The Unharvested Sea weaves sequences of the peregrinations of people looking for traces and remains of their lost ones, of shamanistic rituals for the deceased and of superimposed slow motion shots of water and smoke. Here the literary, the aural, and visual embrace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living mourn the dead as much as it enacts it. It is more a document of this event than a monument for those who passed away, producing an active tension between the event and its recalling, between memory and the many presents of unfolding within the gallery space. As far as its documentary dimension and its (oblique) engagement with politics is concerned The Unharvested Sea participates in what media theorist Jihoon Kim has identified as a ‘post-vérité turn of experimental documentary’, under which falls a hybrid body of work between documentary, experimental cinema, and contemporary art. These works have broken from the participatory mode of documentary film, exploring a whole range of other formal experimentation, including ‘poetic observation’.[10] Everything in The Unharvested Sea – the work of mourning, politics, the worlds of the living and the dead, the crossover between nature and culture (the sea and the ferry) – converges towards the following words: ‘[t]hey said if you enter the sea / You can return to the place where your words were born’.[11]

 

‘體’(tǐ) is the space that cannot be expressed through language and letters.

‘用’(yòng), the wave created in that space. Perhaps, from the beginning,

this book was made for the departure of words.[12]

 

Islands and words. Islands as the milieux of words. Yuri An draws a continuum between the environment, geography, the imaginary, and the symbolic. This is a nexus reminiscent of Gilles Deleuze’s aesthetic and ecological thinking about islands. For Deleuze the essence of the deserted island is imaginary and not actual, mythological and not geographical. At the same time, its destiny is subject to those human conditions that make mythology possible, further probing this potentiality of islands, suggesting to ‘get back to the movement of the imagination that makes the deserted island a model, a prototype of the collective soul’.[13] If we also understand the island as a milieu, namely the product of a co-determination between a physical environment and the symbolic and representational spheres, and the milieu literally as a medium (what is in between), one might say that Yuri An’s exhibition probed these notions anew, the island acting both as figure and motif as well as model to think about the post-medium paradigm.

 

References

Berardi, F. Heroes: Mass murder and suicide. New York-London: Verso, 2015.

Canguilhem, G. ‘The living and its Milieu’, translated by J. Savage, Grey Room, No. 3, 2001: 6-31.

Deleuze, G.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Los Angeles-New York: Semiotext(e), 2004.

Hui, Y. and Mey, A. ‘L’exposition comme médium. Quelques observations sur la cybernétisation de l’institution et de l’exposition’, Appareil, No. 17, forthcoming in 2016.

Jabès, E. Le livre des questions I. Paris: Gallimard/Coll. L’imaginaire, 2006.

Jung, J. ‘A poem dispatched to a sea of submerged words’ in Yuri An: The unharvested sea, exhibition catalog. Seoul: Art Space Pool/Seoul Museum of Art, 2015.

Kim, J. ‘Factory Complex. The Post-Vérité Turn of Korean Experimental Documentary’, Millennium Film Journal, No. 62, Fall 2015: 11-12.

Levi, P. Cinema by other mea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Mamula, T. Cinema and language loss: Displacement, visuality and the filmic image. New York-London: Routledge, 2013.

Oh, J. ‘Hybrid of Poetic Spirit and “Cultural Film”: Theory and Practice of “Cinepoem” (1964-1967) in South Korea’, presentation at EXIS Festival, Audio Visual Pavilion, Seoul, 24 August 2015.

Park, G. ‘The Language of Yuri An’, exhibition text. Cheongju: Cheongju Art Studio/Cheongju Museum of Art, 2015.

Wall-Romana, C.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nch poetry.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13.

 

[1] As mentioned in their mission statement: http://www.altpool.org/_v3/en/about/mission.asp.

[2] Berardi 2015, pp. 191-192.

[3] Jung 2015, p. 10.

[4] I borrow the term ‘rematerialisation’ from Pavle Levi and his analysis of the processes through which ‘cinema’ unfolds in the form of multiple materialities and apparatuses, using as case studies a range of Yugoslavian avant-garde works such as the ‘written films’ of the Hypnist and Zenitist movements active in the 1920s, or the 1970s experiments with the physicality of film. See Levi 2012.

[5] Sailing Words, 3-13 December 2015,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South Korea. Curator Gahee Park considers both solo shows as chapters of the same exhibition, the second being a reiterated attempt (by way of a search for equivalence between text and image) at affirming the status of poetry in the field of contemporary art. Park 2015.

[6] In a seminal chapter of Knowlegdge of Life, Georges Canguilhem traced the genealogy of the notion of ‘milieu’, sometimes translated into ‘medium’. Drawing on Canguilhem’s formulation, along with Yuk Hui, I have formulated a non-substantialist account of the ‘exhibition as medium’ understood as ‘modulation’. See Canguilhem 2001; Hui & Mey 2016.

[7] The original version made in 2014 as part of the artist’s graduation work at the Gerrit Rietveld Academie in Amsterdam has no Korean subtitles. The 2015 version was re-edited for the exhibition at Pool.

[8] Jabès 2006, p. 64 (my translation). This reference was discussed by Yuri An throughout our numerous exchanges, including a public discussion as part of the film program Body Languages curated by Maxa Zoller for the World Script Institute at Cine Code/Art Sonje, Seoul, 22 October 2015.

[9] Mamula 2013, p. 6.

[10] Kim 2015.

[11] The Unharvested Sea, single-channel video, 2015, 09:00.

[12] Sailing Words, exhibition booklet, Cheongju Art Studio, Cheongju Museum of Art, 2015.

[13] Deleuze 2004, pp. 12-13.

July 11, 2016, Necsus

 

 

 

 

안유리의 언어  

박가희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4년 남짓의 시간 동안 작가로서 안유리가 고민하고 작품을 통해 주목한 것은 자리와 흔적이다. 이는 존재하다가 사라진 것의 자리와 흔적, 이를 남긴 이들을 향한 연민과 애도, 또는 이에 자신을 투사하는 동질감에서 오는 관심이다. 이는 작가의 작위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깊이 내재된 일종의 지향과도 같은데,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부로 한걸음 물러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라져 간 것들의 자리와 흔적을 관망하는 태도이다. 주로 망명자들에게 나타나는 외재성의 그것과 닮았다. 안유리는 사라져간 것/이들의 자리와 흔적에서 ‘시’가 태어나고, 이를 더듬고 보듬어 ‘지금’으로 불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안유리는 흔적들을 ‘시’의 자리로 불러들이고자 행위 그 자체, ‘예술하기’에 주목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여전히 항해 중에 있다.

 

2015년 한해 안유리는 두 번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1] 두 전시에서 작가에게 ‘예술하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말과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에게 말과 이미지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지난 일 년간 나눈 수많은 대화와 두 번의 전시를 통해 감지한 안유리의 이동을 살펴보는 변화의 기록이다.

 

첫 번째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서 나는 그가 언어를,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분절된 말과 은유로 가득한 독백과 대화로 이뤄진 시어를 생산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평행하는 영상 속 이미지와 목소리, 그리고 시인과 나눈 대화를 재구성한 설치작 속 말은 의미를 분절하고 파편화하면서 이미지를 보충하고 이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미끄러지고 어긋나며 길항했다. 이처럼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은 ‘시’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시각화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보였다. 그렇기에 말은 이미지를 보조하는 역할이라기보다 적어도 이미지와 동등한 위계, 어쩌면 그보다 우위에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안유리의 의도는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의 시가 아닌, ‘예술하기’의 형식으로 시를 구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다시 ‘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인 그의 작품과 전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아냈다. 과연 ‘예술하기’에서 시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말 그대로 은유로 가득 찬 시어를 생산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그리고 안유리가 생산하고 취한 언어로서의 말은 이미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길항하지는 않는가? 이 둘은 서로를 밀어내고 추동하며 그가 믿는 예술의 자리로 나아갈 힘을 지녔는가?

 

조심스러운 질문을 품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유리의 두 번째 개인전 ≪항해하는 말들≫을 마주했다. 나는 이 전시에서, 특히 두 전시에 다른 형식으로 등장한 작품 <항해하는 말들>(2015)에서 작가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와 구사하는 방식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 작업은 작가가 2011년부터 허수경 시인과 나눈 대화와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앞선 전시에서는 이 작업을 종이에 인쇄하여 숲처럼 설치했고, 후자는 같은 텍스트를 조용히 일렁이는 검은 바다 영상 위에 일종의 빛처럼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투사했다.

 

내가 <항해하는 말들>에서 주목하는 것은 표현된 형식의 차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안유리가 다른 표현 방식을 끌어내면서 언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이다. 굉장히 손쉬운 대응과 단순한 비유일 수 있으나, 나는 첫 번째 형식의 <항해하는 말들>이 조금 더 시의 언어에 가깝다면, 후자의 경우는 번역의 언어에 가깝다고 읽었다. 이러한 구분은 발터 벤야민이 「번역가의 과제」에서 언급한 시와 번역의 상이한 특징에서 빌렸다. 그에 따르면,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메아리치게 하는 배후의 내포된 의미와 여기서 파생되는 영향을 살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언어는 근본적이며 자발적인데 반해, 번역은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서서 어떤 한 지점, 메아리가 울릴 수 있는 한 점을 겨누어 번역어로 외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저는 끊임없이 새롭고 풍부해지며 성숙해 가는 과정을 겪을 수 있다. 그리하여 번역은 두 개의 언어 사이에 평행선을 긋는 것이 아닌 “원천 언어의 성숙과정과 그 자신의 탄생의 아픔을 지켜보는” 것이다. [2] 

 

숲을 이룬 <항해하는 말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언어로서 시어를 생산하고 구사하는 것 자체에 초점을 더 맞췄다. 도달하고자 하는 시의 자리와 이를 위한 예술하기의 맥락에서 설치된 언어의 숲은 사유의 시각화라기보다는 그저 원저자, 즉 화자로서 안유리가 발설하고 싶은, 오랜 시간 담아 두었던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고 싶은 근본적이고 자발적인 동기가 크게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가가 시의 형식을 빌려 시의 자리를 그리거나 보듬기보다는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욕구로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반면, 후자의 <항해하는 말들>은 시인의 위치에서 물러나 작가가 삶의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고 고민했던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존재를 불러내고자 하는 행위를, 영상 매체의 속성인 빛을 통해 소멸한 것을 소생시키는 파생의 언어로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안유리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생성하고 표현하겠다는 태도보다는 가장자리에 서서 시어를 이미지와 빛이라는 다른 차원의 언어로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파생시켜서 의미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자신이 다루는 원저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시각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시의 언어에서 번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아갔음을 볼 수 있다. 이 두 축의 움직임을 단순히 매체에서 매체로의 이동이나 대체로 보기보다는 말의 흔적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의 흔적이 다시 말로 소생되는 순환 구조로 끊임없는 번역을 통해 성숙해가는 과정을 겪었다고 읽었다.

 

두 번째 첫 개인전을 마무리하며 나눈 대화 속에서 작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올리언의 하프를 언급했었다. 이 하프는 연주자와 악보가 아닌 불어오는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선율을 만들어 낸다. 이는 작가가 시의 자리를 찾아 예술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태도와 닮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만들어지는 선율, 원저자가 사라진 자리를 잇는 번역가의 언어, 사라진 이들을 대신하여 내는 목소리, 그것들이 안유리가 구사하고자 하는 시의 언어이고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의 자리일 것이다. 나는 안유리가 이 자리에서 서서 닻을 내리고 불어오는 어떤 바람에도 자유자재로 몸을 맡겨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1] 두 번의 전시를 모두 첫 개인전이라 부르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히 두 개인전의 출품작이 같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두 번의 전시가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전시였다기 보다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챕터로 보였기 때문이다.

[2]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1983, 반성완 옮김, 민음사, p.352-353

2016년 1월 15일, 작가 워크숍,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The Language of Yuri An

Gahee Park (Curator, Seoul Museum of Art)

 

 

What Yuri An has agonized and noticed through her work for about 4 years as an artist is places and traces. That is places and traces that have existed and disappeared, condolences and sympathy toward those who leave them, and interests coming from empathy of projecting itself.

This is like a kind of orientation buried deep in herself rather than the artist’s contrived effort, and is an attitude that watches the places and traces of things that have disappeared, not by standing in the center but stepping back to the periphery and putting some distance. It resembles that of exteriority which is normally found among exiles. Yuri An believes that ‘poem’ is born from things that have disappeared/their places and traces, and the role of artists is to polish, refine, and shape a poem into what it is ‘now’. So, Yuri An is still sailing to search her place as an artist while focusing on the action itself that aims to bring traces to the place of ‘poem’, or ‘artistic activity’.   

 

Yuri An opened her first two solo exhibitions for the past year 2015,[1] and to the artist, ‘artistic activity’ in two exhibitions is mainly comprised of words and images. This writing starts with a question “What do words and images mean to her?”, and it’s a record of change to look at Yuri An’s movement perceived by lots of conversation and two exhibitions for the last year.

 

In Yuri An’s first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I felt she was putting more focus on creating language, more specifically poetic language consisting of monologue and dialogue filled with segmented words and metaphors. For example, the image and voice in a parallel video and the words in an installation work that reproduces conversation with a poet doesn’t complement and connect the image by segmenting and fragmenting the meaning but rather struggle by sliding and falling out. The works in the exhibitions are based on the language of ‘poem’

and seem to be the result of the attempts to visualize it again. Therefore, the words seem to have the equal status as images at least, or gain the ascendency rather than a role in assisting images. But, Yuri An’s intention was to show a poem not as a sort of literature but a sort of ‘artistic activity’, and this is to advance into ‘the place of poem’ again. But, her works of the first exhibition and overall composition of the exhibition

were a little bit different from the artist’s intention, thereby raising the following questions. Is taking the form of poems literally same as producing metaphorically-rich poetic language in terms of ‘artistic activity’? And, how is the language Yuri An crates and takes as a language related to images? Don’t they compete? Do the two have the power to play a role of art she believes while pushing each other and driving?    

 

Having some questions in a controlled manner, I faced Yuri An’s second solo exhibition ≪Sailing Words≫ in a short time.

In this exhibition, especially <Sailing Words>(2015) that appears taking a different type in the two exhibitions, I felt the change in the artist’s attitude about dealing with a language and way to speak it. This work reorganizes a part of conversation and letters the artist has had with poet Huh Sukyung since 2011. In the former exhibition, this work was printed on the paper and installed like the forest, and in the latter, the same text was projected to calmly appear and disappear on choppy black waters like a kind of light.

 

What I notice from <Sailing Words> is not the difference of the expressed form itself but rather the change of Yuri An’s attitude about a language while drawing the different way to express. That might be very easy correspondence and simple comparison, but I read that <Sailing Words> of the first form is more like a poetic language, whereas the latter is like a translational language. I followed this classification from different characteristics between the poem mentioned in Walter Benjamin’s 「The Task of the Translator」and translation. According to him, translation is basically to look at the hidden meaning behind which is making the original book echo as well as the subsequent effects. So, a poet’s language is fundamental and voluntary, whereas translation stands not at the middle but the edge of a certain point that can echo to cry with a translational language.

During this process, the original book can undergo the ceaselessly new, rich, and mature process. So, “translation is to look at the maturation process of the source language and the pain of its own birth, not drawing a parallel line between two languages.” [2]

 

In <Sailing Words> forming the forest, the artist focuses on producing and speaking a poetic language in her own language. The forest of language installed in the context of the place of poems to reach and subsequent artistic activities seems to be fundamentally and voluntarily motivated to express her imagery Yuri An has long cherished to express as an author or a speaker, rather than visualizing thought. This is the point that shows her contradictory desire to take the place instead of drawing or polishing the place of poems by borrowing the format of poems.

On the other hand, the latter <Sailing Words> interpreted the action that aims to bring the temporary and disappearing existence, which the artist has faced and agonized repeatedly in her life, stepping back to the poet’s position, in a derivative language that revives dead things through the light, a characteristic of visual media. During this process, Yuri An shows her will to develop a poetic language into a process of maturing a language to another dimension of image and light and expand the meaning by standing at the peripheral, instead of having an attitude to create and express a language on her own. This shows that she fully understands the original book and advances into the use of a translational language from a poetic language during the process of forming a visual language. I read that the movement of the two axes is not a mere shift from media to media or a substitution, but it has undergone the maturation process through ceaseless translation in a cycle where the trace of language becomes image, and vice versa.

 

In the conversation, completing the first latter exhibition, the artist mentioned Aeolian harp in Greek mythology. This harp makes a melody following the movement of the wind, not a player or music. This resembles the artist’s attitude about continuously trying to do art in search of the place of poems. The melody made following the wind, a translator’s language replacing the place where the original author has disappeared, and voice replacing those who disappear, and all of them are a poetic language Yuri An wants to speak and the place of art to reach.

I hope that Yuri An can make her own beautiful melody by standing at this place, dropping anchor, and going with the flow of the wind.  

 

[1] The reason why I call two exhibitions the first exhibition is due to two reasons. The biggest reason is the works of the two solo exhibitions were same, and then I felt the two exhibitions were not different but one was for the next chapter.

[2] Walter Benjamin, 『 Walter Benjamin’s Literary Art Theory 』, 1983, Translated by Seongwan Ban, Minumsa, p.352-353

January 15, 2016, Artist Workshop at Cheongju Art Studio

 

 

 

 

마침내 시(詩)가 된 말들

정은영 (작가)

 

꽤 오랫동안 안유리는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시를, 혹은 문장을, 무수한 낱말들을, 어쩌면 그저 음절들을 썼다. 어쨌거나 쉬지 않고 썼다. 그의 글은 내게 종종 시가 가진 어떤 것, 그러니까 시적인 무엇, 혹은 이미 시였던 무엇이었다. 말 대신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들락거리는 변덕스러운 그의 표정, 자주 방향을 잃는 부산스러운 대화 위에도 묵묵히 내려앉는 그의 비범한 눈빛, 전생에 웬수라도 진 것처럼 마주 서서 지겹게 뿜어내던 우리의 담배 연기에조차 그는 시어들을 실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따르면 나의 기억은 너무 과장되었거나 틀렸다. 그의 기억은 일종의 ‘문맹’인 상태에서 시작된다.

 

 

어릴 때 내 방도 없었지만 책이 꽂혀있는 책장도 없었다.

조금 컸을 때는 책 보라는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조악한 단어들을 섞어 쓰느라 입이 걸어져 버렸다.

그 버릇을 한동안 못 고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쓰고 싶은 말이 있어도 아는 단어가 없었다.

 

내 손에는 텅 빈 사전이 쥐어져 있다고

오랫동안 남 탓하며 살았다.

내 몸 밖으로, 부모 밖으로, 대문 밖으로,

세상 밖으로 도망치면

그 끝에 다다르면 나도 잘 익은 말 하나,

생각 하나를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 『깍』의 서문 중, 2011

 

 

땅의 끝, 바다의 끝, 하늘의 끝을 수차례 마주하며 도망 다니던 그가 어느 날 그의 첫 책 『깍』을 내밀었다. 고해집 같기도, 에세이집 같기도, 또 시집 같기도, 아티스트북 같기도 한 이 작은 책은 입이 아닌 손으로 발음한 그의 ‘말들’로 지난 시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텅 빈 사전’이 말, 노래, 기억, 손의 춤, 장소의 감각으로, 또한 비로소 세상과 타인을 향한 화해와 사랑의 단어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는 최초의 고백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여러 장소의 가장자리에서, 여러 여자들을 떠올렸다. 할머니, 엄마, 친구들, 그리고 이름으로 남지 않았던 어떤 여자들, 또한 시인들. 그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말’을 전하고 가르친 이들이다. 감각으로만 남은 순간들, 혀 위에서 달그락거리던 사연들, 말이 되지 못했던 노래들, 남겨진 말에는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고통들, 이해 불가의 부당한 세계에 쏟아지는 질문들, 너무 오래 묵혀 속을 알 수 없는 딱딱한 비명들, 그런 것들이 언제나 그의 마음에 침범해 들어왔다. 그런 식으로 그는 다른 여자들로부터 말을, 시를 배웠다. 그렇다고 그의 ‘문맹’이 단숨에 문장이 되거나 문학이 되어갈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이야기가 비로소 말이 되는 순간, 그 말에 힘을 담아 그의 구강을 통해 발음되는 순간, 그 말들이 그의 뭉뚝하고 재주 없는 손을 통해 꾹꾹 눌려 쓰여지는 순간, 그 말들이 그가 본 것들 틈을 가로지르며 세상의 먼 풍경들과 오버랩 되는 그 순간에, 그는 문맹의 기억 위에 ‘자신의 말’을 써내려갔다. 문맹과 문자가 겹쳐지는 두께— 나는 그것이 그의 시어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시어를 읽으며 “유리 너는 정말 ‘시적’이야”라고 말했던 그의 지도교수의 말에 부아가 난 적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어들은 순결한 낭만성이나 시적인 정취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시적인 인물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의 시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어의 정서를 거절하는 시어이고, 시어의 세속적 정의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시어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의 시어는 소음들 속에 자욱하게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삶의 경험과 세상의 풍경들이 함께 직조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쉽게 정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말들은 ‘시적’이기 보다는 이미 ‘시’인 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내게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서경식의 『시의 힘』을 함께 읽을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아래의 문단에 따옴표를 쳐 내게 보내주었다.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니다. 효율이라든가 유효성이라든가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이 길을 걸으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테니 이 길을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과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 서경식, 『시의 힘』, 현암사, 2015

 

 

그의 시어는 힘의 논리를 바꾸어 놓을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서경식 선생이 이해한 것처럼, 혹은 그에 대해 안유리가 동의했던 것처럼 시어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지만, 가장 위태로운 한계지점에서 힘을 발휘한다. 목적도 효용도 없이 발휘되는 힘, 그러나 세속적 ‘힘’이라고 말해지기 힘든 또 다른 ‘힘’. 그 끄트머리(깍),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의 미미한 외침(깍)과 같은 힘. 그의 첫 책의 제목이 무엇 보다도 ‘깍’[1]이어야 했던 이유다. 이후 이국의 언어들 틈에서 자신의 자리를 부단히 닦고 다듬으며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소음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단단히 잠그고 다시 사전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셀 수 있는 단어들 사이에 셀 수 없는 의미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의 단어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누군가를 만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소리 없는 자, 소리 낼 수 없는 자, 어쩌면 죽은자들의 음성이 귓가에 울릴 때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써 내려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다, 나는 살아있다, 라고.

— 세 평짜리 숲, 『세 평짜리 숲』, 2012

 

 

그는 다시 사전을 펼친다. 그의 텅 빈 사전은 이제 제법 쓸만한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을 잡아두는 의미의 지층들 사이를 그는 헤맨다. 그가 알고 있는 힘이 아닌, 어떤 다른 패권들 사이, 그 의미의 정치 속에서 길을 잃는다. 무수한 세속의 의미들을 비자발적으로 미끄러져 돌아다녀야만 할 때, 그는 또다시 그의 말을 찾는다, ‘깍’하고 짧은 비명을 지른다. 이제 그의 시어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만 오직 유효한 말 없는 말, 문자 아닌 문자, 힘이 아닌 힘, 시가 아닌 시, 그런 모순이고 모반이다. 이 세계에서 이방인의 말은 침묵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그 침묵이야말로 그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침묵의 말들마저 이국의 언어로 쓰고 또 썼다. 발음하기 어려운 낯선 단어들, 번뜩 알아차릴 수 없는 외국어의 뉘앙스들 속에서, 무뎌지는 감각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시어가 되어야 할 말들을 끝내 붙잡고 있다.

 

 

이제 벽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사람들의 숨으로 얼룩진 벽의 피부.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을 써 내려간다.

눈을 껌뻑일 때마다 한 줄이 생겨났다 다시 한 줄이 사라진다.

해가 뜰 때까지 수천 개의 문장이 쓰여졌으나 단 하나의 문장만 살아남았다

 나는 너에게 닿고 싶다.

— Brushing Hearts, 『세 평짜리 숲』, 2012

 

 

말들은 쓰여지면서 투쟁한다. 하나의 마음으로, 의미로, 중대함으로 남기 위해. 그것은 말들의 뽐내기가 아니며, 어떤 말이 의미의 패권을 갖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말들이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갖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대, 마땅한 자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닥친 가장 눈물겹고 치열한 투쟁이다. 시대가 삭제해버린 존재를 살려내는 투쟁. 존재를 잊지 않고 남기려는 언어. 존재의 고통을 폭로하는 비명. 우리는 타인에게 닿고 싶다. 이 엄연한 존재를 알리고 싶다.

 

 

일례, 너 내 타이밍[2] 가져갔지? 아침에 보니까 주머니에 하나밖에 없던데, 네가 가져갔지?

분명 두 개 넣어뒀단 말이야. 그래 이년아, 내가 가져갔다. 나도 좀 먹어보자. 너처럼 이거 먹고 정신 뿅 가면 잠 안 잘 수 있다매. 나도 좀 살아보자. 야간 좀 뛰어봐야지. 독한 년, 어휴, 독한 년. 다시리에 네가 서울 가서 독한 년 됐다고 소문 다 났디야. 하하.

— 타이밍, 타임리스, 『깍』, 2011

 

 

평생 악다구니를 쓰며 일했던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 엄마의 힘겨운 청춘과 할머니의 질곡 어린 삶은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당연히 그것을 말한다, 그것을 쓴다. 시대의 포악함을, 노동의 슬픔을, 시간을 앗아간 과거를, 사무쳐 말할 수 없었던 상처가 드러나는 현재를. 그러나 어느새 노래가 된 그 곁의 상처들을. 그 노래의 힘을. 그 엄연함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 할머니가 부른 <해운대 엘레지> 가사 중.

<너의 기억이 사라진 시간만큼 나는 죽어있었다>, 비디오 설치, 2011

 

 

꾹 다문 입술이 못내 달싹거릴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참고 참았던 고요가, 과묵한 말들이 마침내 드러나고자 할 때, 그리고 그것이 묵독 되지 않고 낭독될 때, 심지어 그것이 노래로 불리울때, 사라지기 쉬운 말들이 고집을 부리며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랄 때, 비천함의 그늘에서 자신을 긍정하고자 할 때, 그 허약한 말들은 이제 시가 되었을까. 그 시는 힘을 가졌을까. 나는 문득, 헤르타 뮐러의 말을 떠올린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 『숨그네』 (문학동네, 2010)에 부친 저자의 말 중.

 

 

안유리의 말들이 다시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이제 돌아온 그의 말들은 휘어진 시간의 구석구석을 그러모으고, 공간을 켜켜이 중첩한다. 그의 말들은 더 이상 그토록 타인에게 닿고자 했던 혼잣말이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타인과의 대화로부터 터져 나온 시간과 공간과 개인의 좌표들을 연결해 입체화한다. 숱한 타인의 이야기들이 정박하거나 출항하는 한 이름없는 끄트머리 항구에 그의 말들이 닻을 내린다. 그의 말은 그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시어를 만든다. 타인의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잠시 멈추고 침묵하는 것. 애초에 그의 말들이 시작된 문맹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타인의 말들을 만나는 일 말이다. 나는 미술이야말로 문맹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닌가 늘 생각했다. 논리와 효율과 쓰임이 사라진 자리. 말을 버리고 다른 말들을 빚어내는 자리. 그의 말들이 그래서 미술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당연해 보인다. 문맹의 문장, 문장 아닌 문장이 시작된 곳, 그곳이 그의 시어들이 태어난 ‘집’은 아니었을까. 그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의 말들은 언제나 말들의 바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간 말들은 돌아서지 못한 몸들에 집을 짓고

아직 출발하지 못한 말들은 누군가 떠나간 자리에 이름을 내렸다.

바다는 눈을 떠 불을 밝힌다.

멀리서, 노래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고 있다.

— ‘추수할 수 없는 바다’, 단채널 비디오, 2015

 

[1] 깍은 제주 방언으로 ‘끝’을 가리키는 접미사이다.

[2] 수면 억제제

2015년 8월, 안유리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 도록

 

 

 

 

Words that finally became a poem

siren eun young jung (artist)

 

 

In my memory, Yuri An has been unceasingly writing poetry, sentences, countless words, or perhaps just syllables for quite some time. She has never stopped writing. To me, her writings were often something that a poem possesses, and thus they were something poetic, or something that was already poetry to begin with. Instead of using words, she injected poetic dictions to her ever-changing expressions that shifted countless times; to her piercing eyes that lowered even amid bustling conversations that frequently meandered in direction; and even to the cigarette smoke that drifted upward from our endless smoking while we squared off in conversation, as if we had been enemies in our former lives. However, given her confession, it seems my memory is faulty or overly exaggerated. Her memory begins in the context of a certain “illiteracy.”

 

 

When I was young, I did not have my own room,

and I did not have shelves stuffed with books.

When I grew a little older, I turned a deaf ear to the people

who told me to read, and as I started to add coarse words to my vocabulary,

my language became that of a sailor.

I did not break that habit for a long time

and when I had something that I wanted to say

or something that I wanted to write, I could not find the words to express it.

 

I held an empty dictionary in my hand— for a long time I blamed others.

If only I could escape out of my body, away from my parents,

out the door, away from the world— if I could escape,

I believed that there would be some words, some thoughts, that were just for me.

— Preface, 『Writing on the Edge』, 2011

 

 

Yuri An had encountered the end of the land, the end of the sea, and the end of the sky on multiple occasions—and yet kept running away—when she handed me her first book, 『Writing on the Edge』. This small book, much like a confessional text, a book of essays, an artist’s book, or a collection of poems, filled in the time that had elapsed with “words” pronounced not using her mouth, but using her hands. It was her first confession that her “empty dictionary” is being filled with words, songs, memories, the dance of hands, a sense of space, and, at last, words of reconciliation and love directed toward the world and others.

 

On various occasions she recalled various women at the fringes of various places. Her grandmother, her mother, friends of hers, certain women whose names no longer remain, and, lastly, poets: these are all women who conveyed and taught her “words.” The moments that only remained as sensations; the stories that clattered over her tongue; the songs that could not become words; the pain that she could not bear to include in the words remaining; the inexplicable questions poured out to an unreasonable world; the hardened screams whose meanings we cannot decipher as she harbored them too long—these perpetually intruded into her heart. In this manner, she learned words and poetry from the other women. This is not to say that her “illiteracy” had to turn into sentences, or had to become literature, in a single burst. The moment when her story transforms into words; the moment when words filled with strength are formed with her mouth; the moment when the words are firmly written down with her clumsy and ungifted hands; the moment when the words overlap with distant landscapes of the world, traversing the gaps of what she witnessed: An, who found the ability to write sentences, wrote down her own words on top of her memories of illiteracy. The thickness where her illiteracy and words overlapped—I thought this was her poetic language.

 

An states that she became exasperated with the words of an academic adviser who told her, “Yuri, you are very ‘poetic.’” I believe that she became upset with his words because her poetic language does not originate in pure romanticism and poetic taste, and because she herself did not want to be a poetic individual. I understood An’s reaction because her poetic diction is, ironically, something that rejects the sentiment of poetic language, and because her poetic diction is one that distances itself from the secular definition of poetic language. I believe this is because her poetic words are woven together with individual life experiences and world landscapes that are not easily grasped because they are densely obscured with noise, such that they cannot be easily defined, and, above all, because her words themselves already desire to be “poetry,” rather than to simply be “poetic.” She requested that I read Suh Kyung-sik’s 『The Power of Poetry』 prior to talking to her about her work. And she sent me the sentences below with double quotation marks:

 

 

“What is poetry? What is the ‘determination of the political stance of lyric form?’ I still cannot say that I ‘know,’ but I have an idea, as follows. If you walk a road, but you don’t know whether the road goes the right way, you walk even though there is a possibility that it does not lead anywhere. In other words, it is not a stance of not fighting if there is no chance of winning. Also, it has nothing to do with efficiency and validity. It doesn’t mean that you choose this way because you will quickly get to the destination. In short, it is about something other than the principle of whether or not there is a chance of success, of validity, and of efficiency. It is the language of a poet, and it is a lyric poem. I understand it this way.”

— Suh Kyung-sik, 『The Power of Poetry』, Hyeonamsa, 2015

 

 

Yuri An’s poetic language is meaningful when it changes the logic of power. Just as Suh understands, or, as An agrees with him, poetic language, although it may be fighting with no chance of winning, exerts its power at the edge of an impasse. This power is demonstrated without any specific goal or use, but it is a “power” that cannot be defined as secular power: the edge (kkak) and the power like a weak shriek (kkak-onomatopoeia) that resonate from the edge—these explain why the title of her first book should be “Kkak.”[1] Unceasingly finding and refining her own place within the gaps of foreign languages, she writes as follows:

 

 

I was unable to withstand the noise and closed the doors, jumped into the dictionary again.

Countless meanings lived between countable words.

Standing in front of one word, I knocked on the door.

I waited and waited to meet someone.

When the voices of wordless and speechless or perhaps dead people echoed in my ears,

I wrote them down without hesitation.

Then I thought. I am writing, I am alive.

— A Forest Three Meters Squared, 『A Forest Three Meters Squared』, 2012

 

 

She unfurls the dictionary again. Her dictionary, previously empty, is now filled with perfectly serviceable words. But she wanders about the layers of meanings that contain those words. Then she loses her way amid the politics of meanings among hegemonies that are different from the power that she knows. When she has no choice but to involuntarily slip on and meander around myriad secular meanings, she looks for her own words again. She lets out a terse shriek, “kkak”. Now her poetic language is nothing but language with without effective language, a character that is not a character, power that is not power, poetry that is not poetry—these and other contradictions and insurrections that come only to those who lack their own language. In this world, the words of strangers approach silence. However, Yuri An thinks that this very silence is her language. She wrote and wrote the words of the silence in an alien tongue. Amidst unfamiliar words that she hardly pronounces and the nuances of a foreign language that she cannot instantly grasp, though apprehensive of her senses becoming blunt, she never releases the words that should become poetic words.

 

 

Now it is time for the wall to go to sleep.

The skin of the wall is stained with people’s breaths. I start writing yet unfinished work.

I blink my eyes once, a sentence appears. I blink once again, one disappears.

Until sunrise, thousands of sentences are written, only one survives.

I want to reach into your heart.

— Brushing Hearts, 『A Forest Three Meters Squared』, 2012

 

 

The words being written struggle to remain as one heart, one meaning, one importance. It is not an issue of flaunting words, nor is it a matter of what kind of words holds the supremacy of meaning. It is about words having, at long last, their own “place.” In our era, it is the most painstaking and fierce struggle confronted by those who could not find their suitable place. The struggle to give life to the existence that the era eliminated; the language that does not forget this existence and bequeaths it; and the scream that exposes the pain of existence. We want to reach others. We want to communicate this stark existence.

 

 

Il-rye, did you take my “Timing?”[2] There was only one left in my pocket when I checked in the morning. You took it, didn’t you? I’m sure I put two there. Yes, you hag, I took it. I want it too! Like you said, I can get high on it and go without sleep. I also want to live like the others. I’m going to do night shifts and earn some money. You vicious hag, my god you are tough. There’s already word going around our village that you’ve become a tough bitch after moving to Seoul.

— Timing, Timeless, 『Writing on the Edge』, 2011

 

 

And then An’s mother and grandmother, who worked very hard with acrimony their entire lives, and An’s own existence. Her mother’s painful youth and her grandmother’s arduous life are also a part of An’s life. Naturally, she talks about it and writes it down: the tyranny of the time; the sadness of labor; the past snatching away time; the present where the wounds that pierced their hearts, causing their inability to speak, are revealed; the wounds becoming a song, before we know it; and the power of the song and its undeniable permanence.

 

 

Let’s not separate for good

You and I swore and promised

As time goes by and you pass me by,

if I have no chance to meet you again

(you go and I am left lonely) I cannot forget those times, those days I long for, so I cry

— Excerpt from the lyrics of the Haewoondae Elegy sung by An’s grandmother

‘I was dead as much as your memories were gone’, video installation, 2011

 

 

When our clenched lips moved ever slightly, what were we trying to say? When enduring and enduring silence, reticent words want to be exposed at long last; when they are not read silently to oneself but read aloud; even more when they are sung as a song; when words that easily vanish become unduly stubborn, saying they want to be remembered; and when they affirm themselves in the shadow of humility: I wonder if those delicate words now become a poem. I wonder if this poem has power. The words of Herta Müller suddenly come to mind.

 

 

“The situation was terrible. But the words were beautiful.

I thought that tragedy should wear the clothes of poetry.

To expose its disastrousness, again, tragedy should wear the clothes of poetry; it was the honor of my literature.”

— (From the author’s own words regarding her novel) Herta Müller, 『The Hunger Angel』, translated by Kyung-hee Park, Munhakdongne, 2010

 

 

An’s words went a great distance again and then came back. Her returned words now scrape together every bit of buckled time and stack up layers of space. Her words are no longer a monologue that desired so much to reach others. Instead, they dimensionalize time, space, and individuals, which overflow from countless conversations with others, by connecting their coordinates. Her words drop their anchor at a nameless, final harbor where the abundant stories of others are anchored and from which they set sail. Her words also create poetic language in this manner. This is to say that her words halt themselves and remain silent so as to listen to others’ words. That they return to the memory of the illiteracy where her words first began. And that it is at this exact point where they meet the words of others. I had always thought that this very art is an incident that arises in a place of illiteracy; a place where logic, efficiency, and utility vanish; a place where words are discarded and other words are brought about. In this sense, it seems natural that her words would appear in a place of art. I imagine that the place where sentences of illiteracy, sentences that are not sentences, have their beginning, might be the “home” where her poetic words are born. I wonder if her words were always preparing to depart for the exterior of words in order to come back to this home.

 

 

The words that left home in order to find home, built houses on the bodies that could not turn back.

The words that are not yet able to leave come to anchor their names on places left behind.

The sea opens its eyes and lights up.

From afar, the song is sailing home.

— ‘The Unharvested Sea’, single channel video, 2015

 

[1] “Kkak” is a suffix in the Jeju dialect with the meaning of the “end.”

[2] Sleep suppressant

 

Catalog for Yuri An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Art Space Pool, August of 2015

시(詩)가 필요했던 이유

안유리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 부쳐

안소현 (독립 큐레이터)

 

 

하나, 질문

 

왜 이미지에 말을 다는가? 소리의 동시성을 확보하기 이전에도 무성영화에는 자막화면이 있었고, 개념이 미술의 주재료가 되기 훨씬 전에도 중세 종교화의 필렉터리(phylactery)나 만화의 말 풍선이 있었으니, 시각 이미지에 말을 덧붙인 형식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안유리의 말들은 이미지와 함께 놓인 말에서 관성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기능, 즉 선명한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안유리의 영상 속 목소리는 그 장소가 어디라고, 인물이 누구라고 설명해주는 해설(narration)이 아니며, 때로 무성영화처럼 검은 화면에 글자들만을 늘어놓아 이미지로부터 분리시킨 말들도 대사(dialogue)가 아니다. 그것들은 소통에 있어 불친절한 이미지를 보완해주는 친절한 말들이 아니다. 그녀가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의 말들조차 툭 터놓은 고백이라기 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시어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며, 심지어 그 말들은 공간 속에 조각조각 빨래처럼 널려있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안유리는 말들의 투명함도 연속성도 포기한다. 이미지보다 훨씬 강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말, 이어짐을 통해 선명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의 특권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그 말들은 시각 이미지와 동등한 위상을 요구하고, 심상 이미지로 넘쳐나는 시가 되려 한다. 안유리는 왜 시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그 시는 영상 이미지와 어떤 관계일까? 

그런데 작가 안유리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필자에게 되돌아온다. 언어의 선명함을 버리고 굳이 시를 좇는 작가의 말에 어떤 말을 부쳐야 할까? 말로 환원되지 않는 이미지로 가득찬 말들에 태생적으로 사족이 되곤 하는 비평의 말들을, 그것도 모든 가능성을 향한 개시인 첫 개인전에 얹는 것은 굳이 필요한 일일까?

 

둘, 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유리의 말들은 풀어낼 것을 종용한다. 시가 되고자 하는 말을 함부로 축내지 않고 풀이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시와 가장 먼  곳에서 종종 발견된다. 안유리가 좀더 많은 내포를 가진 시어를 원했다면, 나는 큰 외연을 가진 상자 안에 안유리의 말들을 가능한 많이 쓸어담으려 한다. 이런 경우 수(數)와 통사(統辭)라는 큰 상자는 꽤 유용하다.

안유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2가 많다. 낮과 밤, 물과 뭍, 떠나온 곳과 떠나간 곳, 할머니와 내가 있다. 그 숫자는 영상에서도 고스란하다. 섬과 뭍을 연결하며 둘로 갈라진 바다, 한껏 깊이 물을 받아들이는 둘로 쪼개진 땅, 심지어는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가는 화면은 좌우가 반전되어 두 개가 마주붙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온갖 움직임들이 가득차 있다. 물에서 뭍으로 “숨이 옮아가”고, 낮과 밤이 “손을 맞잡다 놓는다”. 자라고, 옮겨지고, 떠나고 돌아오고, 들이쉬고 내쉬고, 길어올리고 닻을 내린다. 이항(二項)들 사이에는 온통 동사들이 분주하다. 반면 꾸미고, 규정하고, 단정하는 형용사와 부사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안유리의 이런 어법은 그녀의 카메라의 언어, 즉 카메라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움직임에서 다시 발견된다. 안유리의 카메라는 두 지점 사이의 움직임을 고르게 잡아내는 데 능하도록 뒤로 물러나있지, 가까이 얼굴이나 한 지점을 당겨 특정한 감정이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말로 치자면 꾸며주고 부각시키고, 감정을 드러내는 클로즈업은 형용사와 부사다. 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멀찌감치 물러나서 두 지점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온전히 담는 시선은 동사에 가깝다. 안유리의 렌즈는 강박 없이 담담히 반복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거나, 한 곳에 집중된 초점 없이 멍하게 떠 있는 풍경을 향한다. 안유리의 영상에는 놀랍도록 줌인이 없다. 이 때문에 이미지로 가득찬 독백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건조함을 유지하며 두 공간 사이의 움직임을 충실히 담아낸다.

 

셋, 추측

 

안유리는 왜 이토록 둘과 움직임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리고 윤기나는 말과 영상을 왜 그토록 기피하는 것일까? 그녀가 말에 느꼈을 예민함, 시를 필요로 하게 된 계기와 움직임의 관계를 추측해본다. 먼 곳으로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낯섦을 만들고, 말, 특히 파롤의 낯섦은 가장 먼저 다가온다.  이방인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랑그를 익혀 명확한 소통에는 성공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은 말을 실제로 써온 사람들에게 각인된 소리, 기억, 습관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내는 정서이다. 설사 이방인들이 마침내 그들과 구분되지 않는 발음과 억양을 가진다 할지라도,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만이 나눠갖는 비밀스럽고 미세한 과거의 감각들은 이방인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비교적 너그러운 랑그와 달리, 파롤은 이방인에게는 기억의 공유를 허락하지 않는 잔인함을 가졌다. 예민하면서도 체념하지 않은 안유리는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로는 허락되지 않은 그 감각을 보란듯이 자신이 타고난 말에서 끄집어낸다. 우선 멀고 낯선 두 지점 사이를 이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보다 더 먼 기억, 할머니의 말, 설화, 신화 등 자신의 생물학적 삶을 넘어선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가장 소통하기 힘든 것, 모국어의 랑그로도 전달할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감각을 시인의 말들을 빌어 끄집어낸다. 못다한 말들이 노래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익숙한 파롤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은 (시인은 제외하고, 아니 어쩌면 시인은 이미 그 밖에 있다) 잘 인지하기 힘든 상태이다. 안유리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정작 노래의 주인들은 돌아오지 못한 몸이거나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자이기에 노래는 시인의 입술을 찾아 닻을 내린다.” 작가는 가능한 멀리 떠돌다 시어를 통해 가장 깊은 정착을 시도한다. 안유리가 이항들과 그 사이의 움직임에서 시를 찾는 이유는 그렇게 추측된다.

 

 

넷, 요청

 

이제 안유리의 노래로부터 조금 물러나 질문으로 되돌아 가자. 그녀의 시어들을 넉넉한 상자에 담는다 해도 비평은 근본적으로 구심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을 덧붙이는 것이 여전히 손쉬운 환원이 아닌지 우려하게 된다. 다만 이 글이 작가가 엮어내기 시작한 이미지와 말의 힘들을 내려놓거나 그에 만족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제 성공적으로 서울에 닻을 내린 그녀의 노래들로 하여금 다시 떠날 채비를 하게 할 수 있다면, 이 환원의 말들조차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몇 가지 요청을 덧붙이려 한다.

영상 이미지와 언어는 물과 뭍처럼 만나지만, 그만큼 다른 질감을 갖는다. 안유리가 선택한 무성영화 같은 자막 화면이 이어지다 갑작스럽게 이미지가 등장하는 방식은 그 다른 질감을 드러내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텍스트가 이미지를 보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이미지로부터 소심하게 분리시키는 것보다 이미지를 압도하는 텍스트의 힘을 보여주는 것, 그들 사이의 극명한 괴리나 그들 사이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힘싸움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녀가 시를 필요로했던 것만큼, 그 시를 책이 아닌 영상과 설치로 보여주려고 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시를 고파하는 이유만큼 공간을 고파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길 요청한다.  아마도 거기에는 익숙함 이상의 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말이 길어올리는 정서를 집어낼만큼 충분히 예민한 작가가 한 영상에서는 영어 목소리와 한국어 자막, 다른 영상에서는 한국어 목소리와 영어 자막이라는 단순한 일대일의 소통 방식을 택한 것 역시 지나치게 단순해보인다. 번역된 자막은 말들의 차이를 드러내기보다는 없애는 데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안유리가 타인의 목소리를 단순히 어떤 랑그의 능숙함을 기준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목소리에서도 자신의 언어와 카메라의 어법이 보여준 일정한 거리가 나타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봄직 하다.  

 

간결한 이항들과 끊임없는 움직임들로 가득찬 안유리의 말들은 그것들에 말을 함부로 더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 힘이 만일 멀고 긴 여행에 주로 의지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귀향은 그 힘을 사라지게 할 위험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말에 대한 그녀의 예민함이 모국어를 되찾은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익숙한 파롤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기를 희망한다. 먼 곳을 돌아 시인이 되려하는 그녀에게 남겨도 좋다고 생각되는 말은 사실 하나이다. 머무른다 한들 시인에게 언제 제 집이 있었겠는가.

 

2015년 8월, 안유리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 도록

 

 

 

The reason the artist needed poetry

-Commentary on Yuri An’s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Sohyun Ahn (independent curator)

 

 

One: A Question

 

Why does one put words to images? As silent films featured subtitle screens even prior to the arrival of sound synchronization, and religious paintings in the Middle Ages had phylacteries and cartoons had speech bubbles long before the “concept” became the central material in artworks, the form of adding words to visual images requires no emphasis here. However, Yuri An’s words do not aim at clear communication, that is, the function that we initially expect from placing words together with images. The voice that emerges within her video work is not a narration that describes the setting or who the speaker is, and the words occasionally arranged on the silent film-like black screen, isolated from the images, do not form a dialogue. These are not helpful words that complement dispassionate images to facilitate communication. Even the words of her written correspondences with a poet are not frank confessions, but instead efforts to draw closer to enigmatic poetic language. The words go as far as to hang suspended like laundry in the exhibition space, such that they are not smoothly connected. Yuri An gives up the transparency and continuity of words. This means that she forfeits the privilege of words that are comprised of promises, words that are much more powerful than images that make vivid communication possible via their connection. Instead, the words demand a status equal to that of visual images and attempt to become poems that overflow with mental images. Why did she need poetry? And what kind of relationship exists between her poetry and her moving images?

 

Yet the question I had directed toward the artist returns to me, the writer. What kind of words should I add for an artist who has discarded the clarity of language and obstinately chases after poetry? I find myself unsure as to whether I should write critical words that become inherently unnecessary comments towards words full of images that cannot be reduced to words, and especially whether it is truly necessary to add those words to her solo exhibition—the artist’s first step toward all the possibilities that lay ahead.

 

Two: An Interpretation

 

Nevertheless, An’s words urge us to explain. Without squandering them, we may uncover a way to interpret the words that strive to become poetry at the place that is furthest from poetry. If An desired to have poetic words with greater connotation, then I would rather sweep as many of her words as possible into a box with great denotation. In this case, a large box of numbers and syntax are particularly useful.

 

The number two appears frequently in the words that An uses: daytime and nighttime, water and land, the place from which one left and the place to which one went, grandmother and I. This number appears in her video work as well: the sea connecting the island and land, dividing them into two; the land splintered in two, absorbing was much water as it can; even scenes in which the waves that roll in and back out are connected to face one another via a mirror image. And filled in between these are myriad kinds of movement. From water to land, “breath spreads,” and daytime and nighttime “hold hands, then let go.” Growing and relocating, leaving and returning, inhaling and exhaling, raising and lowering the anchor—the verbs are wholly occupied amid these binaries. On the other hand, adjectives and adverbs, which adorn, define, and conclude objects, are extremely limited.

 

But we can again find An’s type of phraseology in the language of her camera; in other words, the movements by which the camera creates meanings. Her camera hangs back in order to capture the movement between two points evenly, and it does not emphasize a certain affection or importance by drawing a face or a point closer. In the sense of words, the close-up, which adorns objects, highlights them, and exposes their affection, is the adjective and adverb. In contrast, the gaze that maintains a discrete distance and steps back so as to fully embody the events occurring in between two points is closer to a verb. Yuri An’s lens focuses on actions coolly repeated without obsession, or faces toward blank, floating landscapes that lack a focal point. Surprisingly, there is no zooming-in in her videos. As such, they maintain a dryness despite the monologue that is full of images, and they faithfully embody the movement between two spaces.

 

Three: An Assumption

 

Why is An preoccupied with the number two and with movement? And why does she avoid glossy words and video? I surmise that this is attributable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ensitivity that she felt in words, the trigger for her need for poetry, and movement. One’s relocation to a distant place necessarily creates unfamiliarity, and the unfamiliarity of words, especially the unfamiliarity of parole, approaches first. Although strangers could succeed in clear communication with persistent effort by mastering langue, something still remains that they could not possibly obtain no matter hard they try. These are the sounds, memories, and habits ingrained in people who have actually used that language, and the sentiment that they evoke. Even if strangers finally were to achieve a pronunciation and intonation indistinguishable from these people, strangers are never permitted the secret, delicate senses of the past that only people who have spent time together share. Different from the relatively generous langue, parole has a cruel character that does not allow strangers to share memories. Yuri An, who is deeply sensitive but does not give in to resignation, confidently extracts from her native language a sense that an unfamiliar language would not be permitted to grasp in a foreign place. First of all, she moves between two points that are far apart and unfamiliar. Furthermore, she delves into memories that go back even further than her own memory, such as her grandmother’s words, folktales, and myths; in other words, memories that extend beyond her actual life. And, borrowing the poet’s words, she isolates the innermost sense that is the hardest to communicate, one that even the langue of a mother tongue cannot convey. Owing to this, her yet unspoken words become a song. It is a state that those who are within the familiar boundaries of parole (except poets, or perhaps poets already outside of the boundaries) find difficult to recognize. Yuri An expresses this situation as follows. “[I]ts creators have never returned, or have lost their language. So the song searches, and casts its anchor on the poet’s lips.” The artist wanders as far as she can and attempts to create a rootedness of utmost depth through poetic language. I can presume this is the reason she finds poetry in binaries and in between binaries’ movements.

 

Four: A Request

 

Now, shifting slightly from her song, I would like to return to the question. Although I attempt to contain her poetic words in a box that is sufficient, criticism does not necessarily escape fully from its centripetal force. So I fear that if I add these words to her works, it may nevertheless remain a simple reduction. However, if this essay can dissuade the artist from becoming satisfied and putting down the power of images and words that she has begun to weave together, if it can serve as a trigger for her songs that effectively dropped anchor in Seoul to depart again, then I expect that even these reductive words can be meaningful, and I would thus like to add some additional comments. 

 

Although moving images and language encounter each other just like water and land, they have different characteristic textures to that extent. However, the way that the silent film-like subtitle screens continue and the images suddenly appear—something that An chose—does not appear to sufficiently reveal these differing textures. If she is unsatisfied with the way that the text complements the images, can she find a way that shows the power of text prevailing against images (rather than separating the text from images in a timid manner), and that gives rise to an extreme estrangement and a fierce clash between them? Moreover, I believe that as much as she has a hunger for poetry, there should be a reason for why she presents poetry in the forms of video and installation, rather than in book form. I suggest that the artist pose the question of why she wants to negotiate a space in the same manner as a poem. I believe that the answer is something that lies beyond familiarity.

 

Yuri An is a deeply sensitive artist who is able to extract the affections that words evoke in a strange place. But it seems too straightforward for her to chose a simple one-to-one method of communication where one video features a voice in English and Korean subtitles, and the other has a voice in Korean and English subtitles. Translated subtitles effectively eliminate the differences of languages rather than reveal them. Lastly, assuming that An did not simply chose others’ voices under langue’s criteria of proficiency, I would suggest that she direct toward herself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is an appropriate distance in their voices, like the distance she presented through her words and her use of the camera.

 

Full of simple binaries and endless movement, Yuri An’s words have the power to make one hesitate to rashly add commentary or words. However, if this power is generally dependent on a distant and lengthy journey, then the fact that she has returned could be a hazard that makes this power vanish. I hope that her sensitivity toward words ceaselessly drives her to the exterior of parole’s familiar boundaries, even in the circumstances of regaining her mother tongue. To Yuri An, who wants to be a poet after returning from a great distance, I would like to impart a final word: Even if poets stay somewhere for a time, they never have their own homes.

 

Catalog for Yuri An solo exhibition 『The Unharvested Sea』, Art Space Pool, August of 2015

Review
Essay

Essay

한진의 시법(詩法): 압운(押韻)의 시간, 해조(諧調)의 운율
안유리(미술 작가)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Ars Poetica by Archibald MacLeish

아치볼드 맥클리시의 ‘Ars Poetica’는 라틴어로, ‘The Art of Poetry’, 즉 시(詩)의 기법(技法) 혹은 시법(詩法)으로 옮겨 해석할 수 있다. 맥클리시가 제안하는 시(詩)가 갖추어야 할 또는 놓여 있어야 할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 읽다가 결국 저 문장에 다다른다. 결국 시(詩)는, 그리고 예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려 애쓰기에 앞서 존재해야만 하며, 그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여기에 있다”의 증명은 아닐 것이다. ‘Ars Poetica’의 뜻처럼,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고 작동하기 위해 나름의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수행의 반복을 통해 작품이라는 또 다른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단어들 가운데 내가 ‘법(法)’을 쥐고 한진의 작품세계를 돌아보려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해 스스로 타협하지 않으려는 원칙과 신념이 그녀가 창작하는 행위, 나아가 삶 전반에 걸쳐 무척 중요한 태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지난 몇 년 간 한진의 작업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이미 두 편의 글을 보탰다. 
이 글은 한진의 개인전 《아득한 울림》(2015),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2016), 《흑빙(Black Ice)》(2018), 마지막으로 《벡사시옹(Vexations)》(2021)의 여정을 다시 반추하며, 최근에 참여한 그룹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을 통해 내가 새롭게 발견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평소 기억하고 싶은 단어들을 기록해 두는 데, 가끔 그것들 가운데 가까운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것들이 있다. 이 글은 동료 작가이자 친구로서, 한진의 다음 작품 여정을 즐겁게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잠시 기착지에서 그녀에게 전달하는 작은 노트이다.

 

“기이한 것이란 특정한 형태의 동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포함된다. 기이한 존재 혹은 대상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그런 존재 혹은 사물이 여기에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껏 차용해 왔던 범주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결국, 기이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불충분했을 뿐이다.”

-마크 피셔(Mark Fisher)[1]

 

최근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에는 한진이 이전 전시에서 출품한 작품 중 일부를 선보였으나, 새로운 맥락과 공간에 놓여서인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작품들이 있다. 해안 절벽에 서서, 이른 아침에 시작해 한낮을 거쳐 해 질 무렵까지 바라본 모습을 담은 <해안선 Op.2>(2017-2018)는 한 캔버스에 축적된 여러 시간들이 오롯이 제자리를 찾아 ‘불현듯' 외치듯이 내게 다가왔다. 한진은 이런 순간을 음악 용어인 ‘스포르찬도(sfz)’와 닮았다고 이야기했다.[2] 그것은 악센트(accent)처럼 앞과 뒤 음의 강세가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게 연주되는 것과는 달리 여리게 건반을 계속 두드리다가 '돌연히' 그 음의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한진은 이것을 “이와 같은 시차는 '유실' 및 '허상'의 상태와 닮아있다. 이들은 묵음과 같이 읽히지 않아도 존재하며 기억을 수식하는 중요한 단서로 남는다.”고 했다.[3] 작가는 지속되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묵음(默音)'으로 남길 바라는 시간에도 캔버스에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보인다. 묵음(默音)으로 표기되는 특정 단어들은 "어떤 소리에도 대응하지 않는 글"을 가리킨다. 나는 이 단어의 뜻을 한진의 작품을 보며 이렇게 바꿔보고 싶었다. “쉽사리 해독되고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소리".

 

작가는 2016년에 선보인 개인전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무대를 상상하며 작품 설치를 시도한 적이 있다. 베케트에 대한 여러 글 중, 최근 다시 집어 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 속에서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진이 말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추측하는 묵음(默音)과 같은 태도가 아닐지 생각했다.

 

“잘 말하기란 확립된 의미들의 반복에 불과하다. 잘 보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은 법칙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잘못 말하기’ 또는 ‘잘못 보기’는 바로 이러한 법칙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로지 잘못 말하기와 잘못 보기만이 이러한 법칙을 깨고 새로운 창안을 가능하게 한다. 법칙성을 파괴하는 사건을 기존의 법칙에 비추어 잘못 말하는 것이 바로 사건의 명명이다. 그 명명은 항상 ‘잘못 말해진 것’의 질서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의 창안이 이루어진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4]

 

작가는 개인전 《벡사시옹(Vexations)》(2021)을 통해 동명의 에릭 사티(Erik Satie)의 곡 <벡사시옹(Vexations)>과 사무엘 베케트의 <쿼드(Quad)>에 영향을 받아 본인의 해석을 담은 작품 여러 점을 선보였다. 알다시피, 사티의 “840번 ‘반복'하시오”라는 지시문을 담은 <벡사시옹(Vexations)> 악보와, 무대 위 배우들이 지칠 줄 모르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베케트의 쿼드<(Quad)>는 서로 닮은듯 느껴지는데, 나는 이 운동성과 그 흔적을 한진의 드로잉 연작 <Was in Sorrow in a Soft Air Op.1~Op.12>(2017~2018)와 <Tone Roads Op.1>(2016), <Tone Roads Op.2>(2017), <Tone Roads Op.4>(2019)를 통해 새삼 다시 발견했다. 앞서 언급한 단체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24)에서 한진은 독립된 공간에 위 작품들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도록 조도와 각각의 각도를 매우 세밀하게 연출했다. 순간 작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는데, 마치 문자 그대로 ‘빛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드로잉으로 다가왔다. 영상 작가인 내게는 ‘포토그램(photogram)’ 기법이 연상되었다.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 만 레이(Man Ray) 등이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사용했던 포토그램은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지 위에 물체를 놓고 빛을 비추어 음영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리킨다. 포토그램의 가장 큰 묘미는 빛의 미묘한 해조(諧調)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해조(諧調)는 대개 조화로움, 즐거운 가락 등으로 해석되는데, 이 경우 농담(濃淡) 기법처럼, 빛의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까지 균형 있게 나아가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해조(諧調)의 궤적'이다.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내달리기 위한 목적의 움직임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만들어내는 '운율' 감각을 한진의 드로잉 연작들에서 마주했다. 이것은 시(詩)작법 중 하나인 압운(押韻)에 의해 만나게 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동일한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아름다운 해조(諧調) 현상[5]을 그려내기 위해 한진의 손은 부단히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 작품 <That's how the light get's in>(2021)은, 작가가 잠시 손을 거두고 응시하는 자리에 말 그대로 빛이 그려졌다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빛의 지층이 쌓였다 다시 퍼져 나가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결국 하나의 움직임을 반복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작가는 쉬지 않고 자신의 캔버스 앞에서 수행을 거듭한다. 때로는 그 가락이, 소리가, 세상의 기준에 익숙한 ‘조화로움'이 아닐지라도, 자신만의 음을 찾아 쉴 새 없이 연주하듯 벽 앞에 서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압운(押韻)의 시간이자, 해조(諧調)의 운율이다.

한진의 시법(詩法)이다.

[1]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마크 피셔, 안현주 옮김, 구픽, 2023.

[2] 작가노트, 한진, 2021.

[3] 위와 같음.

[4] 「사건과 그 이름」, 『베케트에 대하여』, 알랭 바디우, 서용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013.

[5] 「우리 시의 압운(押韻)」, 『엄살의 시학』, 강홍기, 태학사, 2000.

2024년 8월, 작가 한진 비평론.

 

언어의 갈라파고스를 넘어서: 속삭이는 분자들

안유리(작가)

 

 

안녕하세요, 안유리입니다. 저는 주로 역사와 정치적 굴레 속에서 개인의 삶이 공동체와 국가에 의해 규정되고 변모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고 혹은 충돌하는지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사라진 말과 이야기들에 귀 기울였습니다. 텍스트, 비디오, 사운드처럼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매체에 담아 표현하고 있고, 2016년부터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어인 ‘우정’에 대해 저는 언어적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려합니다. 국가, 민족, 인종처럼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주어지고 입혀진 정체성의 한계를 넘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갈라파고스의 모순

1835년 찰스 다윈이 탐사한 이후,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의 바탕이 되었다고 전해진 갈라파고스는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제도는 적도 부근에 자리하고 육지와 상당히 떨어져 있어, 고유의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갈라파고스와 같은 남태평양의 많은 지역이 상대적으로 외부 세계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높기도 하며, 동시에 언어 다양성 또한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갈라파고스를 경제학 용어로 해석했을 때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1990년대 일본 경제학자가 언급한 ‘갈라파고스 현상’은 특정 지역에만 통용되는 한정된 기술로 국제 표준화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갈라파고스라는 한 단어를 둘러싼 상이한 정의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즉,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단절하거나 고립되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외치는 통합은 결국 다양성을 묵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우리가 왜 순수성과 다양성을 경쟁의 구도로 봐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득 고유성과 순수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한 화학자를 떠올렸습니다.

 

2. 언어의 순수성에 저항하는 디아스포라의 언어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저서 <주기율표>에서, 원소 중 하나인 ‘아연’을 예로 들어 파시즘을 설명했습니다. 아연은 독특하게 어떤 불순물과도 섞이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많은 전체주의자가 주장했던 자기 민족, 국가, 문화의 우수성과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인종, 시민들을 배척하고 혐오했던 것과 유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탄소는 어디에나 있고, 무엇과도 섞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존재를 탄소와 같은 불순물에 비유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거대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자신들만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보다 탄소와 같은 존재로서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대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나와 다른 존재를 가로막는 요소로써 순수성과 고유성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진행해온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통해서 국가와 민족의 순수성과 고유성에 저항하며 대항하는 존재들인 디아스포라의 언어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지배국의 언어와 모국어, 모어와 모국어 사이를 횡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존재합니다. 지난 일련의 작업을 통해 민족과 국가라는 견고한 틀 너머의 목소리에 주목했고, 대문자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우정과 연대를 위한 도구로써의 언어

다음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선보이게 된 작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가 암스테르담 유학 시절에 썼던 텍스트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당시 이방인으로 유럽에 살면서 스스로 느낀 고립감, 소통과 불통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는 과정에서 썼던 텍스트의 일부를 개작해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텍스트가 제게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는 단순히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 번역 혹은 통역될 수 없는 간극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모일 수 있고 그것이 정해진 화음에 벗어나더라도 기꺼이 발화하며 서로 경청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속삭이는 분자들 Whispering Molecules>라는 제목의 이번 작업은, 여러 개의 원자가 화학적인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분자’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즉, 어떠한 원자들이 결합하냐에 따라 성질이 변하는 분자처럼, 각각의 언어와 그 사용자들의 만남에 의해 이야기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했습니다. 메타버스 공간 안에 떠다니는 텍스트들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고 이어지는 형상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도시 생태학 연구자 친구에게서 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박새는 한 서식지에 머무는 텃새인데, 그들 사이에서는 소리 언어(노래)로 소통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주목할 지점은, 박새는 만약 포식자가 나타날 경우 외부에서 들어온 철새들에게도 똑같이 위험 신호를 보낸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철새들은 박새가 부르는 노래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철새는 이동하며 각각 지역에서 만난 새들의 노래를 습득하고, 그것을 다른 새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한답니다. 결국 언어라는 것은 나와 너, 우리와 우리가 아닌 집단을 가르는 표식이 아니라 마치 박새와 철새들이 나누는 노래처럼 서로의 안전과 생존, 나아가서 우정과 연대를 끌어낼 수 있는 도구로 사용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2022년 7월 20일, 2022 MMCA 아시아 프로젝트 서울 그리고 카셀 <테라코다 프렌드십 - 우정에 관하여>, 발표 원고

 

허광표 개인전 《Act 1》에 부쳐

안유리(작가)

 

허광표는 재중 동포인 조선족으로, 중국 길림성 도문시에서 태어나, 연변대학교 미술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2016년부터 한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 허광표의 첫 번째 개인전이자, 한국에서 첫발을 떼는 행위의 시작점이다.

‘Act’는 행동이라는 뜻이자, 연극 용어에서는 막(幕)을 가리킨다. 또한 막(幕)은,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드로잉 연작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로써,

개인의 시야를 막는 사회적 권력과 폭력의 이미지를 내포하며, 동시에 각자 내면에 자리한 선입견을 뜻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재인식하고, 동포이자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며,

시야가 차단된 장막 안의 사람들을 화면으로 불러낸다. 이것은 작가 허광표의 초상(肖像)이자, 외부 세계로 나가려는 움직임이다.

이제, 그의 1막이 시작된 셈이다.

2019년 11월, 허광표 개인전 <Act 1 > 전시서문

회소의 서(書)

한진 개인전 《흑빙(Black Ice)》에 부쳐

안유리(작가)

 

 

‘회소’라는 단어는 한자 표기에 따라 두 개의 다른 뜻을 지닌다. ‘회소(回蘇)’는 거의 죽어가다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가리키며, ‘회소(繪素)’라 쓰면, 그림을 뜻한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큰 상실감의 흔적을 기꺼이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응집시켜[1] 그림으로 다시 삶의 자리를 내어주기. 작가 한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만들어놓은 회소의 길을 따라 작은 기록(書)을 덧붙인다.

 

최근 몇 해에 걸쳐 선보인 한진의 개인전 《아득한 울림》(2015), 《White Noise》(2016), 《흑빙(Black Ice)》(2018)을 통해, 가장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다 멈추고, 손에 잡힐 듯 다가오다 이내 곧 떠나는 소리처럼, 위태롭지만 사라지지 않는 작가의 잔향을(殘響) 볼 수 있었다. 한진 스스로 밝혔듯, 그녀는 단순히 시각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 대상과 공간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 그 소리가 만들어낸 연상의 마주침을 담아 온몸으로 그린다. 그것은 캔버스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내면에 깃든 소리에 스스로 반응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음악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듣는 행위가 일어나는 정확한 시점은 언제인가? 다시 말해 연주자는 지금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연주하게 될 음악을 앞당겨서 머릿속에서 듣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 역시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직관에 기대어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내가 연주하고 있고 그러면서 이제 막 연주하려는 음악을 거의 들을 수 있는 상태다. 그렇게 되면 연주가 머릿속의 그 이미지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실체를 뒤따르는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에 앞서는 그림자인 셈이다." [2]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이외에도 무수한 소리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청자(聽者)가 마주한 공간, 심리적 상태에 따라 소리는 선택적으로 다가온다. 필립 글래스가 말한 실체에 앞선 그림자라는 것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으나 ‘고스란한 그 무엇’[3]으로 전해지는 감각의 지속성이 발현(發現)된 자리가 아닐까. 이번 전시 제목인 ‘흑빙(Black Ice)’은 한진의 작업 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이자, 그 세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은 왜곡되고 희석될 가능성이 내포되어있으며, 그것을 소환하는 시점에 의해 기억의 형상은 달라질 수 있다. 한진은 강렬하게 들러붙은 기억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묶어두기보다, 서서히, 그렇지만 자신이 마주하는 매 순간의 미끄러짐과 안착하지 못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 속 요소들은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가지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적으로 캔버스 안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것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집중적으로 들었던 찰스 아이브스(Charles Edward Ives)의 음악과 닮아있다. 미국 현대 음악가인 찰스 아이브스는 무조성(無調性), 다조성(多調性), 우연 음악 등을 실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은 두 개 이상의 선율 혹은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곡이 상당히 많다.

 

“아이브스의 음악이 특이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음악의 사회적 측면에서든, 자연적 측면에서든, 친숙한 곡조에 관련시켜 볼 때 고유한 것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이브스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어떤 신비한 것이 있다. 그것이 내 책에 씌어 있는 내용이다. 즉 나는 그것을 진흙, 음악적 진흙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나에게 이 풍요로운 진흙으로부터 한 사람이 아닌 사회 여러 사람의 존재를 암시하는 그 무엇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흙이 있는 까닭에 그의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작품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당신도 분명히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한다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당신 자신의 모양으로 듣는 경험을 하기 위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방식으로 그 경험을 완성해야만 한다.” [4]

 

아이브스의 곡 <Tone Roads>와 동명인 드로잉 작업 <Tone Roads #1>(2016), <Tone Roads #2>(2017), <Tone Roads #3>(2018)을 통해, 한진은 음악에서 말하는 ‘Tone’ 즉, 음색(音色)을 시각 언어로 전환하는 것에 몰두했다. 작가가 다른 색을 거두고 오로지 연필만을 사용해 Tone을 실험하고자 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색 대신 종이의 차이를 선택했다. 판화지부터 닥나무 종이까지, 각각의 두께와 질감에 따라 종이는 작가가 결정한 Tone을 받아들이고, 떠올랐다가, 스며들었다. 이것은 아이브스가 가진 ‘음악적 진흙’처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다. 때문에 소리의 길(Tone Roads)을 따라 만나는 바람, 돌, 향기, 슬픔, 상실, 고독은 하나의 선(line)과 하나의 Tone으로 요약되거나 압축될 수 없다. 각자 자신의 자리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한진의 진흙’이라 말하고 싶다. 그 ‘진흙’은 작품의 ’고유성’을 가리키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한진은 자신의 기억 속 풍경과 현재 마주한 상황 사이에서 쉬이 마침표를 찍지 않고, 오롯이 그 시간을 감내하고 분투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의심과 불안은 시선의 운동감으로 화면에 펼쳐진다.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잔잔한 바다가 아닌, 자신을 삼킬 듯 달려드는 발아래의 파도(<해안선 Shorelines #2>(2017-2018)), 고요한 밤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기억의 흔적(<Was in Sorrow in a Soft Air> 시리즈(2017~2018))에서, 우리는 작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한진은 수평선과 지평선을 기준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욱 가까이 동시에 멀리 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눈앞에 달려든 바람의 흔들림에 집중했다면(<바람의 노래 The Song of the Wind 시리즈(2012~2014)>), 최근작 <바람의 안쪽 Inner side of the Wind>(2017)에서는 하나의 시선이 더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본 풀들의 거센 흔들림, 풀들을 헤치고 들어서자 순식간에 찾아드는 고요한 내부의 세계. 운동은 시선뿐만 아니라 소리에도 적용된다.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람이 자신을 꽉 껴안는 순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바람은 침묵을 부르기도 한다. 침묵은 상실의 감각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현재를 뚜렷이 인식하게 만든다. 자신의 곁을 떠나간 존재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숨을 참는 시간. 기다림. 다시 마주하며, 기다림.

 

8세기 초에 쓰인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전체 분량에서 앞뒤가 소실되어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문장의 구성은 대개 이런 식이다.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다.”[5] 언뜻 매우 명료한 문장 구성처럼 보이지만, 약본(略本)인 까닭에 학자마다 해석이 제각기 다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는 단테의 신곡을 여러 버전의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왕오천축국전』을 붙들고 있는 학자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혜초 그 자신보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수없이 맴돌며 이미 주어진 길 위에서 방향을 잃다가도 또다시 단어를 길어 올려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한진 또한 하나의 원전(原典) 앞에서, 설사 자신의 기억과 경험일지라도 쉽게 캔버스로 옮기지 않는다. 한 언어가 또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확신 대신 언어의 이동에서 발생한 호흡을 살피고, 붙잡기보다 마음을 내어주며 자신의 그림이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는지’ 계속해서 더듬고 있다. 작가는 아이브스의 음악에 빗대어 자신의 작업 과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절뚝, 절뚝, 쉽고 빠르게 나아가지는 않으나,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으면서.” 한진은 그렇게, 있다. 어쩌면 ‘낮도 밤도 없는 곳’을[6] 향해.

 

 

[1] 《흑빙(Black Ice)》 작가노트, 한진, 2018

[2] 『음악 없는 말』,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이석호 옮김, 프란츠, 2017

[3] 《흑빙(Black Ice)》 작가노트, 한진, 2018

[4] 『케이지와의 대화』, 리처드 코스텔라네츠(Richard kostelanetz), 안미다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1996

[5]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 정수일 옮김, 학고재, 2008

[6] 새벗출판사에서 펴낸 단테의 신곡 번역본 제목. 『낮도 밤도 없는 곳(새벗이야기들13)』, 유영희 옮김, 1986

 

2019년 2월, 한진 개인전 <흑빙(Black Ice)> 도록

동결(凍結)된 순간, 해빙(解氷)의 공간

오택관 개인전 <긋기_그래픽쳐스- 공간탐색>

안유리(작가)

 

 

그는 캔버스 앞을 서성인다. 붙잡고 싶은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어릴적 자신의 방 창문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굴절된 불빛, 그 빛이 그려낸 조각난 형상들. 숨을 고른다. 안과 밖의 풍경이 다르게 느껴졌던 시간. 눈에 담아내기에 빠르게 흩어진 기억들. 힘껏 숨을 토해 낸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흐릿하게 남은 점, 선, 그리고 리듬. 이제 그는 서서히, 하지만 힘찬 몸짓으로 몸의 기억들을 새겨넣는다. 붙잡는다. 잔상(殘像)은 형상(形狀)으로 오택관의 캔버스에 얼어붙었다.

 

오택관은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쉬지 않고 자신의 눈을 기억의 저장소로 사용했다. 작품제작 초기부터 현재까지,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 사이의 공간을 탐색하고자 했다. 초기작 <Bird’s Eye View>를 살펴보면, 오택관 자신과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창’을 정면에 내세운다. 그것은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뚜렷이 드러낸다. 원근법으로 구성된 이미지 대신, 세상을 정면으로 보고자하는 열망과 한계, 저항과 다짐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본인의 성정(性情)과 닮아있다. 작품 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면서도 실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때문에 화면에 드러난 창은 캔버스 앞에 오택관 자신이 서 있다는 증표다.

 

그는 다시, 캔버스 앞을 서성인다. 보다 가까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눈을 껌뻑일수록, 불빛도 빠르게 흩어진다. 자신이 붙잡고 싶었던 형상이 조각나있다. 자신 안에 분열된 감각들이 손끝으로 이동한다. 이미지는 계속해서 캔버스 밖으로 빠져나가려 애를 쓴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Off the Map> 시리즈는 그러한 시도 속에 탄생한 작업이다. 숨기고 감추기보다, 작가 본인의 분열된 자아들을 캔버스라는 지도 위에 길을 잃은 모습 그대로 펼쳐놓는다. 하지만 그 역시도 보이지 않은 그리드(Grid) 위에 정렬된 모습으로 얹혀놓는다. 그는 보다 캔버스 안으로 안으로, 그러다 다시 밖으로 나와 파편의 조각들을 붙잡는다. 주로 영상을 다루는 내가 여기에 없는 시간과 공간의 ‘재생’을 위해 빛을 스크린에 ‘투사’한다면, 오택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빛을 캔버스에 ‘붙잡아’둔다.

 

2015년부터, 오택관은 <그래픽쳐스(Graphictures)> 시리즈에 몰두한다. 멀리서 조망하는 시선에서 자신의 눈을 클로즈-업 하여,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과 현상, 소음과 움직임을 캔버스 위로 옮겨왔다. 이 시리즈들에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빠른 리듬이 캔버스 틀에 붙잡혀있는 인상을 받았다. 각 요소는 자유롭게 표면 위로, 춤을 추듯 붓질이 거침없이 가로질러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프레임으로 안전한 집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집이 결코 한 자리에 머물고자 내린 영구적 닻이 아니며, 완결된 서사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눈이 여전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기록의 산물이다. 실제로 작업량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전에 작업해둔 캔버스를 다시 꺼내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2015년 개인전 ‘그래픽쳐스-흔적’에서 그는 대형 패널을 여러 개 이어붙인 하나의 거대한 회화를 선보였다. 이 작업을 계기로 그는 10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2015년에 선보인 패널을 앞으로 10년 간 만나게 될 공간을 고려해 패널의 숫자와 크기 및 구성을 재배치하여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시말해 9개의 패널(1220x2440mm)은 정해진 공간을 이동하며 변모(變貌)한다. 그 이후 2017년 오택관 x 서윤정 2인전을 통해, 앞서 말한 10년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 타이틀인 ‘Alter Space’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작업이 놓일 장소에 따라 일시적이지만 그곳만의 생명력을 담아 변화하는 회화를 구축했다. 이처럼 오택관의 작업은 점점 벽에서 공간으로, 평면에서 건축적으로, 동결(凍結)된 순간에서 해빙(解氷)의 공간으로 움직이고 있다. 건축과 회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안과 밖 그리고 내부(전시공간)에 쌓여지는 패널은 다시 건축적으로 구축된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로 2015년에 결성한 ‘오와김’ 활동을 꼽을 수 있다.

 

미디어 작가 김유석과 결성한 ‘오와김’은 2016년 대청호미술관에서 선보인 <흑백 물결>을 시작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청주의 대청호를 주제로 삼아, 자연과 문명에 대한 두 작가의 시선을 회화와 미디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실험적으로 해석, 표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공간에 가득 찬 3x8m의 거대한 스크린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움직였다. 오와김은 이동하는 스크린을 캔버스 혹은 순수한 자연으로 상정하여, 대청호를 둘러싼 이야기와 이미지를 80점의 벡터 드로잉을 제작하여 투명 아크릴판에 옮기고, 기계장치를 통해 스크린 주위를 360도 맴돌며 그 위에 그림자를 투사했다. 이전에 붙잡힌 듯 고정된 이미지들이 스크린이자 캔버스 위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골조는 최근 2018년 우리미술관에서 전시된 <부두의 흔적>이란 영상 설치 작업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인천의 만석부두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상 설치작품은 3개의 와이드한 투명필름이 켜켜이 배치되어 영상과 함께 그의 드로잉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오와김에게 포착된 부두의 모습들은 투명한, 투사된, 겹쳐진이란 시각언어를 녹여내며 동결된 순간은 해빙을 맞이한다. 또한, 2017년 갤러리 초이에서 열린 오택관 X 마엘 라부시에르(프랑스) 2인전을 통해, 그의 작업은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그리고 움직이는 형상을 드러낸다. 전시 ‘심플 액션’에서 오택관의 회화는 안전한 벽에서 뜯겨 나와 각기 다른 크기의 프레임을 안고 조각처럼 공간에 흩어졌다. 다시금 그가 공간과 리듬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초기의 작업이 한 장의 사진처럼 얼어붙은 Still image에 가까웠다면, 심플액션 작업은 회화 자체가 움직이는 연속된 이미지 조각 즉, 필름의 한 롤이 전시장 전체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2018년에 선보인 <오택관-Prounspace>를 통해, 각각의 이미지 요소들이 더욱 과감히 공간을 장악하고 새로운 시공간을 구축하는 인상을 준다. 밀폐된 6각형의 방 안 전 면에 반사체를 설치하여 중력을 거슬러 몰입하게되는 체험으로 이끈다. 작품 <Prounspace>를 준비하면서 오택관은 러시아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러시아 구축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인 엘 리시츠키(El Lissitzky)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엘 리시츠키 스스로 명명한 자신만의 회화 스타일인 ‘Proun’은, 평면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각 요소의 배치와 리듬에 따라 운동감이 느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오택관은 석사학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스로 정신적 범주의 시선을 화면 위에 물리적인 접촉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신체를 기준으로 근방으로 펼쳐지는 공간을 ‘국소적 공간’이라 부르고, 이에 대해 지도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국소적 공간이 그 부분으로서 자리매김되는 전체로서의 공간을 ‘전역적 공간’이라 부르기로 하겠다”.[1]

 

이미 오래전, 그는 자신의 시선이 나아가는 방향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했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건축적인 감각과 각 이미지 요소 간의 리듬이 충돌과 균형의 반복 속에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상정된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배반하고 그의 작품 속에서 다시 연결지으며 구축되는 세계,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형태의 회화에서 최근에 보여준 설치 작품들까지, 시선의 움직임 혹은 마주한 대상의 심리적 크기에 따라 형식과 매체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캔버스 앞을 서성인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다음 작업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조심스럽게 그는 대답한다. “나는 다시 캔버스 앞에 서서, 아직 도착하지 않는 시간과 리듬을 기다리며 작업을 지속할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원형에서 파생된 결과 대신, 작가는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매 순간 숨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품은 각각의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얼어붙고, 풀리기를 반복하면서 그의 작업은 고정된 채 안전한 나이 듦을 멈추고, 계속해서 태어나기를 갈망한다.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온 회화가 오택관의 스튜디오에서는 여전히 젊다.

 

 

[1] 오택관, “분절된 자아의 감각확장에 대한 연구 - 본인작품 <Birds Eye View>와 <Off the Map> 연작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2019년 1월, 오택관 개인전 <긋기_그래픽쳐스-공간탐색> 도록

코리안 디아스포라 : 물뿌리로 가는 길
안유리(작가)

▲이호철=교육·학술, 나아가 경제교류의 가능성을 어떻게 봅니까.

▲김성=연변 조선족이나 한국국민이나 다같은 습관과 문화를 가진 한뿌리의 민족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괄목할만한 경제력·산업기술이 연변쪽으로 뻗쳤으면 좋겠습니다. 현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지원입니다.

▲이호철=우리가 연변동포들의 생활을 볼때는 첫 느낌이 아하 이게 한국인들의 살아가는 원모습이 아닌가.

이게 바로 우리가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정서의 한원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두분이 바라는대로 고도의 산업기술력이 연변의 모습을 바꿔놓으면 인간성의 상실이랄까. 고유의 정서체계가 파괴될 까 염려스럽습니다.

우리 것, 우리문화를 튼튼히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큽니다.

▲김성=산업화 물결이 밀려오면 어느정도의 물질 문명오염은 감수해야겠지요. 연변이 “영원한 한국의 민속촌” 이 되길 바라십니까.

- 출처: 중앙일보, “전문가들이 말하는 중국속의 한국문학 좌담 : 사회주의 탈피 다양한 삶을 표현”, 1989.05.13 (강조표시는 필자가 한 것임)

 

소설 <판문점>의 작가 이호철과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이 나눈 대담기록의 일부이다. 기사 작성일이 1989년을 보고 나서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의식속에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는 화석화된 채 머물러있다. 다시 말해, 100년 전 흔히들 간도, 만주라 부르던 장소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21세기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대다수 한국인은 조선족에게 여전히 한복차림에 소달구지를 밀고 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모습들을 ‘소환’한다. 반대로 한 손에는 돼지 뼈를,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든 채 거리를 활보하는 무법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난 3년간,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앞서 언급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또한 ‘한뿌리’, ‘한민족’, ‘동포’, ‘국가’와 같은 말들이 얼마나 쉽게 오용되고 있는지 목격했다. 이 글은, 내 손에 쥐고 있던 단어들 간의 분투의 기록이자,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호월일가(胡越一家) :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짧은 유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가장 주목한 사실은 이전과 다르게 눈에 띄게 늘어난 외국인의 유입이었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시아 출신의 산업 노동자들이 한국을 찾기 시작했고, 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인의 이주는 해마나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조선족의 경우, 재외동포 자격으로 한국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고, 일부는 삶의 터전을 한국으로 옮기는 일도 생겨났다. 내가 조선족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여느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달리 여전히 우리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00년 전 이 땅을 떠난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그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담기 위해 2016년 처음, 연변으로 탐사를 떠났다. 첫해 탐사를 통해 마주한 것은, 내가 읽었던 역사책 속의 사람들도, 장소도, 이야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내가 떠올린 단어는 다음과 같다.

 

호월일가(胡越一家)

 

국어사전에 따르면, “호월일가”(胡越一家)는 두 개의 뜻을 가진다.

 

1. 중국 북쪽의 호(胡)와 남쪽의 월(越)이 한집안이라는 뜻으로, 온 천하가 한집안 같음을 이르는 말.

2.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곳에 모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단어를 첫 번째 뜻으로 헤아려본다면, 결국 이 세계는 모두에게 ‘하나의 집’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모두 ‘한 가족’이라는 뜻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 세기 동안 파시즘과 인종주의 광풍의 결과를 다시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라는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힘과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프로젝트 첫해, 연변에서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나는 물었다. “말씀하시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나는 재차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족’ 입니까?”. 그는 내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답을 되돌려주었다. 나는 쉽사리 그 답변을 잇는 말을 찾지 못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당신은 ‘단일 민족 국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또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국가’와 ‘민족’이라는 말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또 다른 사람이 건넨 질문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을까?”. 하지만 그 많은 ‘우리’라는 말속에 정작 ‘우리는 어디에도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나는 이 단어의 두 번째 뜻을 손에 쥐고 이야기를 이어가려한다. “서로 각자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곳에 모임을 뜻하는 말”, 호월일가(胡越一家). 그 ‘한 곳’은 무엇 너머의 ‘상상의 장소’가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쩌면 같은 자리라고 오해하며 섣불리 금을 그었던 곳을 가리킨다. 그곳을 쉽사리 ‘경계’ 혹은 ‘타자’라 부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달라서….”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다”와 같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막(幕)과 같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누구나 알지만, 이 세계에 또 다른 무수한 “나”들이 있다는 기대 또한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 몇몇 시인과 예술가들의 문장 속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나게 된 이 질문을 꺼내 본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질문을 따라 길을 헤매던 중, 두 개의 텍스트를 만났다.

 

“나는 종점(終點)을 시점(始點)으로 박군다. 내가 나린곳이 나의종점(終點)이오. 내가 타는곳이 나의 시점(始點)이 되는까닭이다. 이쩌른 순간(瞬間) 많은사람사이에 나를 묻는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皮相的)이된다. 나의 휴맨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發揮)해낸다는 재조가 없다. 이네들의 깁븝과 슬픔과 앞은데를 나로서는 측량(測量)한다는수가없는까닭이다. (…) 그 육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遙遠)한데 있어 도락구의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北京行)이니 남경행(南京行)이니 라고써서 타고다니는것이아니라 밀고 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엿볼수있다. 그것이 고력(苦力)에위안(慰安)이않된다고 누가 주장(主張)하랴. 이제나는 곧 종시(終始)를 박궈야한다. 하나 내차(車)에도 신경행(新京行), 북경행(北京行), 남경행(南京行)을 달고싶다. 세계일주행(世界一周行)이라고 달고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眞情)한 내고향(故鄕)이 있다면 고향행(故鄕行)을 달겟다. 다음 도착(到着)하여야할 시대(時代)의 정거장(停車場)이 있다면 더좋다.”

-「종시」(終始), 윤동주, 1941

 

“어려서부터 나는 조국에서 유랑을 체험하며 살았다. 외적 유랑의 삶을 산 것이다. 나는 내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 밖에서 난민이 되었다. 나는 감옥을 경험했다. 구금 또한 유랑이다. 내적인 유랑 속에서 나는 말을 통해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외적인 유랑 속에서 말을 통해 조국으로의 귀환을 실현코자 하였다. 말은 길이요 다리가 되고, 몸 담을 거처가 되어주었다. 내가 귀환했을 때-은유적으로-외적 유랑과 내적 유랑이 뒤엉켜버렸다. 내적 유랑이 내 시 세계의 일부가 되어서만이 아니라 그것은 동시에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중략)언어는 나의 세계를 재구성할 능력과 유랑을 길들이려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부여할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유랑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언어 속에서 시인의 입지가 확고해지고, 언어는 시인의 은유적 조국이 되었으며, 시인의 수단이자 동시에 본질이 되었고, 그것으로 시인의 몸을 지켜줄 집이 되었다.”

- 「유랑에 관하여」, 마무드 다르위시 Mahmoud Darwish(팔레스타인 시인), 2007

 

종점(終點)을 시점(始點)으로 바꾼다는 윤동주. 그는 자신이 속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타인에게 다가간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타인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로 들린다. 내적 유랑과 외적 유랑 사이를 오가다, 자신의 집은 시(詩)라는 것을 고백한 마무드 다르위시. 시인의 육신의 집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나, 시(詩)가 기거할 곳은 오로지 시인 그 자신의 몸이며 그곳에서 태어나고 간직될 것이다.

불온한 별들 : 민족과 국가, 그 의미의 거미줄에서[1]

 

프로젝트 첫해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 사이를 오가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후에는 연변을 넘어,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 조선족의 위치와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역사와 정치적 변화의 굴레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입고’, ‘벗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이후 2년 동안 리서치를 지속하면서, 디아스포라의 공통적 과제-고국과 모국 사이의 괴리감, 동포와 외국인 사이에서 자리 잡기-을 보다 깊숙이 마주할 수 있었다. 2017년 12월 31일, 나는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으로 갔다.

 

매일 일몰과 일출 시각에 맞춰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 국기 게양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주저 없이 일몰 시각을 확인한 후 길을 나섰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국기 게양식을 보기 위해 모여있었다. 저무는 해 너머로 붉은 국기는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날인 새해 첫날, 나는 다시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급기야 천안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지하철역의 출입구는 모두 폐쇄되었다. 안전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광장으로 나선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고 길었다. 몇 해 전 테러 위협 이후로, 천안문 광장 일대에 대대적인 검문, 검색대를 설치하여 통행하는 모든 사람의 신분증과 짐 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한 절차인 듯 줄을 섰다. 중국 사람들이 그토록 보기를 소망한다는 국기 게양식의 위엄을 비로소 실감했다.

 

본 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광장에는 많은 사람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경이 아닌 다른 지역의 소수민족으로 보이는 가족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마오쩌둥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 너머 젊은이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넷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와 머리 사이에는 수십 개의 휴대폰 카메라들이 떠다녔다. 마침내 식이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은 숨죽인 채 군인들의 행진과 그들의 손에 들린 국기에 온 시선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광장에 모인 ‘그 사람들’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곳에 모여 있는가? 그들에게 이 순간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과 달리,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나라, 중국. 중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국기인 오성홍기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전국에 국기 디자인 공모를 했다. 쪙롄쓩이라는 사람의 디자인이 최종안으로 당선되었고, 그는 중국의 오랜 속담인 “별과 달을 고대한다”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5개의 별 중, 가장 큰 별은 공산당 즉, 국가를 상징하며 나머지 네 개의 작은 별들은 각기 다른 계급의 인민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별은 달을 고대 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는 드넓은 우주 속에서 별과 달은 각기 자신들만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즉, 인민은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족과 국가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 가운데, 자신을 한국도 북한도 아닌 ‘조선적’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더는 지도상에 없는 나라의 국민이자, 엄밀히 말하면 무국적 상태를 뜻한다. 중국 조선족의 경우에는 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상의 나라인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동포라 불러서 왔는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오래전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장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을 다시 곱씹는다. 그리고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또 다른 답을 제시한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한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 「민족이란 무엇인가?」, 에르네스트 르낭, 1882

 

결국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에게 한민족 즉, 같은 민족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근대의 발명품인 국가와 만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망각하고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작품 <불온한 별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떠돌이 행성”(Rogue Planet)에 관한 글을 읽었다. 행성과 유사한 질량을 지니고 있으나, 어떤 항성의 중력에 속박되어 있지 않아서 우주 공간을 독립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행성급 전체를 가리켜 떠돌이 행성(Rogue planet) 혹은 고아 행성(Orphan planet)이라 부른다. 나는 이 떠돌이 행성이 디아스포라의 궤적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일제 식민지의 신민에서 분단된 조국의 실향민으로, 다시 중국의 공민이 되기까지, 조선족을 포함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자리는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행성의 궤도에서 비켜나 있어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불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들만의 항로를 따라 항해를 지속하고 있는 별들.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생각한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의 견고한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어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물뿌리로 가는 길

 

얼마 전 새로운 작업을 위해 두만강이 흐르는 북-중 국경도시 도문을 찾았다. 두만강은 ‘만 가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도문은 두만강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두만강의 뜻인 ‘물의 근원’을 가리키는 여러 말 중, ‘물뿌리’라는 단어가 있다. 남한에서는 더는 사용하지 않으나 북한어 사전에는 수록되어 있다. 물과 뿌리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뿌리라는 것은 본디 하나의 장소에서 정박해야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물이 내로, 내에서 강으로, 다시 바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갈래와 시작점을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최근 몇 년 사이, 두만강 일대는 통일 전 베를린이나 DMZ 인근 지역처럼, 긴장감이 흐르는 도시로 바뀌었다. 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두만강은 삶의 방향과 뿌리를 옮기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지만 물뿌리를 옮겨간 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장소다.[2] 어쩌면 디아스포라에게 하나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혹은 나눌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가 모어와 모국어, 2개를 동시에 사용하듯 그들에게 완벽한 하나의 정체성은 존재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기원의 신화를 넘어서, 지금 내 앞에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한족말로 우-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분다

- 「연변 2」, 석화, 2006

 

[1] ‘의미의 거미줄’은 막스 베버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제안한 문화해석 방법론을 말한다.

[2] 「상상 공동체와 비현실적 조건문」, 베르너 시파우어, 2006

2018.11.15, <아시아 아시아> 2018학년도 제31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학술제 초청강연 원고

 

 

소리의 자리, 시간의 음역(音域)

한진 개인전 <White Noise>에 부쳐

안유리(작가)

 

 

오래전 중국의 한 소수민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살고 있어서 외부인과의 접촉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 거대한 기암절벽이 우뚝 서 있어 건넛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때문에 마을에서 건넛 마을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문자가 적힌 종이 대신, ‘휘파람’이었다. 그들은 각자 전하고 싶은 말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휘파람을 통해 전달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저마다 각각의 다른 음역과 세기를 가지고 있다. 마치 깊은 바닷속의 고래들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친구에게 노래를 통해 안부를 전하는 것처럼, 그들의 휘파람을 따라 물자가 전달되고 누군가의 탄생과 죽음이 전해진다. 소리는 공간을 가른다. 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는 시간을 이동하면서 하나의 상(像)을 그려낸다. 때로는 누군가의 머릿속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손끝으로 상(像)이 내려앉는다. 소리가 그려낸 공간을 마주한다. 나는 듣는다. 소리가 출발한 곳에서 여기까지, 그 여정의 시간을 잠자코 듣는다. 이것은 내가 한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에게 건넨 말이다. 그림을 보거나 읽는 대신, 듣고 있다고. 소리의 움직임이 그의 그림 속에 연주되고 있다고.

 

한진은 작가 노트에서 “나에게 현실을 감각한다는 것, 기억을 지속 시킨다는 것은 소리를 인지한다는 것”이라 밝혔다. 주로 페인팅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청각적’ 감각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한진 그림의 시작점은 캔버스 위가 아니라 그곳에서 도달하기까지 온몸으로 느끼고 분투한 행위의 시간들일지 모른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각기 다른 동사의 시제들이다. 소리는 머물고, 아득하게 울리고, 거기에 있다가, 흩어진다. 때로는 저만치, 때로는 스며들어, 결국 내면(Innig)[1]으로, 제자리를 찾아 도착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들은 소리가 이동한 시간을 공간으로 옮겨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청각적 매질(媒質)이 시각의 표면 위로 자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자신의 매체에 상응하는 한 가지 감각만으로 인지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문득 눈(眼)의 시인이라 불리는, 찰스 레즈니코프(Charles Reznikoff)가 떠오른다. 그의 시(詩) 중 하나를 옮겨보자면,

 

달빛 비치는 밤

 

나무들의 그림자들, 풀밭 속 검은 웅덩이들 안에 누워있다.

 

한진의 드로잉 <밤의 소절 #1>, <밤의 소절 #2>를 보고 난 후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레즈니코프가 묘사한 장면과 매우 흡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즈니코프는 자신이 마주한 세계의 풍경을 “눈”에 담아두었다가 시로 옮긴다면, 한진은 달빛이 비치는 시간의 소리 들을 캔버스 위에 내려 앉힌다. 그리고 우리에게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밤의 소절을 듣도록 붙잡아둔다.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템포 루바토”를 집어 든다. ‘템포 루바토’는 이탈리아어로 뺏는다거나 훔친다는 뜻이 있으며, 지정된 템포 혹은 리듬에서 자유롭게 조절하는 연주기법을 가리킨다. 이 기호를 주어진 악구(樂句)를 벗어나 단순히 제멋대로 연주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렇게 “훔쳐낸” 박자를 악구(樂句) 내에서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 즉, “다른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까지 이 기법의 몫이다. 한진은 템포 루바토에 대해 ‘쉼표’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내게 “침묵”은 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혹은 “침묵”의 자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대게 “침묵”은 아무 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침묵 또한 소리의 영역 안에 존재하며, 말 그대로 “소리 없음의 소리”이다.[2] 음절과 음절 사이를 통과하는 시간의 소리, 멈춤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침묵은 아닐까. 따라서 “쉼표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의 ‘쉼표’는 한음에서 다른 음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나 특정한 패턴으로 명명할 수 없는 소리 즉, ‘화이트 노이즈’가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말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이 유일하게 일어나는 장소의 소리, 화이트 노이즈가 한진이 그려내려는 상(像)의 자리가 아닐까. 여기서,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선보인 <스민 밤 #2>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전시공간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놓여 있으며 그 뒤로 두 개의 나무 패널이 마치 무대의 막처럼 버티고 서있다. 관람객들은 그림 앞에 서서 볼 수도 있고, 패널이 자리한 안쪽 공간으로 과감히 넘어가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앞에서만 관람하도록 연출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라면, 이 작업은 그림의 뒷면 즉, 무대 너머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로 이어진다. 작가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이 펼쳐지는 무대를 상상하면서 이 작품의 설치방법을 고심했다. 모두 익히 아는 대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은 극적인 순간 혹은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 혹은 여럿이 모여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만 일어나는 상황이다.[3] 한진은 자신의 그림들을 마치 무대 위 인물들처럼 그곳에 세워두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림이 제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정오의 빛과 해 질 녘의 어스름의 빛깔이 다르듯, 그림도 제자리에서 빛과 온도에 따라 미세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늘 그 자리에서 한진의 그림들은 블라디미르와 아스트라공처럼 묵묵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시인 허수경은 산문집 <길모퉁이 중국식당>에서 고고학자로서 발굴경험을 소개한 대목이 있다.

“발굴을 할 때 땅 빛깔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빛깔이 변할 때마다 새로운 문화지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4] 한진의 그림들은 고고학자들이 땅의 그림자와 지형의 빛을 읽어내는 것처럼,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기억이 빚어낸 지층들을 캔버스 위로 쌓아 올린다. 겹겹의 층들 사이로 여러 음들이 움직인다. 나는 귀 기울인다. 튜닝을 마치고, 무대위로 그림들은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나선다. 빛이 무대 위를 비춘다. 나는 다시, 그들이 연주하는 그림의 시간들을 듣는다. 녹턴의 시간에서, 다가올 빛의 소리를 기다린다.

 

 

[1] <White Noise> 출품작 제목을 인용한 것임.

[2]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옮김, 까치

[3] <과자에서 돌까지-베케트의 프랑스어에 관한 노트>, 굶기의 예술, 폴 오스터, 최승자 옮김, 문학동네

[4] <전갈에게 물린 남자>, 길모퉁이 중국식당, 허수경, 문학동네

2016년 11월, 한진 개인전 <White Noise> 도록

 

이민휘 <빌린 입> 추천사

안유리(작가)

시인이자 수필가인 다이앤 애커만(Diane Ackerman)이 쓴 <감각의 박물학>(A Natural History of the Sences)(1991)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들은 보이지 않은 길의 미로, 즉 노래의 길을 따라 영토를 나눴으며, 이들은 노래 길을 넘나들며 일상적인 생활을 꾸려나간다.

하나의 거대한 대륙인 호주는 실은 미로와 같은 노래길로 이루어져있고 애버리진들은 그 길을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 길위를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흥얼거림, 흐느낌, 멈춤, 어쩌면 그저 숨일 뿐일지도 모르는 소리들이 허공에 떠도는 공기와 섞여 노래를 만들어내고,

우연히 그 길에 발을 내디딘 누군가가 그 노래를 이어부르는 장면을 오랫동안 상상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낯선 세계로 들어섰을 때 잠시 길을 잃더라도

한 발자국 더 내딛을 수 있도록 손짓하는 지도이자 악보가 아닐까. 이민휘의 <빌린 입>을 들으면서 오랜만에 이 장면을 다시금 떠올렸다.

한 곡에서 다음 곡으로, 또다시 다음 곡으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그의 목소리가 연주되는 세계를 따라 나아갔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곡명 중 신체를 가리키는 말들-입, 발, 그리고 받아쓰는 손-이 또 다른 말들-돌팔매와 거울, 꿈과 빛-과 만나

당겨졌다 후퇴하고 깨어졌다 사라지는 인상을 받았다. 내 귓가에는 그가 고른 말들의 잔향과 멜로디의 숨소리들이 가득하다.

잠시나마 이민휘가 내게 건넨 지도를 따라 그의 세계에 다녀온 느낌이다.

 

실은 내가 이민휘를 만난 건 딱 두 번뿐이다. 어느 해 늦가을, 서울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든 로테르담에서, 그리고 이듬해 한여름 서울의 한 작은 카페에서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를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내 귀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와 음악 때문일 것이다.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장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의 목소리를 지금, 내 곁으로 불러낼 수 있으므로. 그렇게 이민휘는 또 하나의 지도를 들고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가 건넨 지도를 들고 노래 길을 따라 걸어보자. 그 노래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려지고 이어지기를. 사라지고 기억되기를.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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